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야누스 (문단 편집) ==== [[소 플리니우스]]와 기독교 ==== >[[파일:트라야누스이집트 1.jpg]] >----- >이집트 덴데라 신전[* 현 [[퀴나]] 근처]에 [[파라오]]의 모습으로 조각된 트라야누스 <[[박물지#s-3|박물지]]>의 저자 [[대 플리니우스|대(大) 플리니우스]]의 양자이자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소(小) 플리니우스]]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에서 총독으로 재임한 동안,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서신을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 받았고 이를 <서한집>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행정능력과 원수정 시대의 로마 통치체계 연구를 다루는데, 이 기록을 많이 참조한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 트라야누스의 성격과 행정, 정무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상당히 유연한 현군임을 수 없이 보여주고 있다. <서한집> 안에 나타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 트라야누스는 저자 외의 다른 총독들과도 비슷한 서한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런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늘 책임감있고 단호한 입장에서 일일이 답변을 해줬다. 로마 제정 시대 황제들은 속주 총독들 외에도 현지 유력자, 지식인들의 탄원서 등을 전달받고, 속주 총독과 각지의 군단장들의 보고서 및 동향보고도 매일 같이 올라왔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도 그 업무량은 살인적인 수준으로 벅찼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황제들은 비서와 고위관료들에게 일부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거나 황제가 지침을 정해 일관된 매뉴얼에 따라 답변하고 때론 명령을 덧붙여 가이드라인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가 [[폭군]], [[암군]]으로 알고 있는 대개의 [[칼리굴라|황]][[도미티아누스|제]][[카라칼라|들]] 역시 이와 비슷했는데, 이들의 경우에도 트라야누스처럼 일을 미루지 않았고 중요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사를 적극 표시해 그 지침을 법적 근거를 거론하며 하달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아예 업무 자체를 방치해버리고 보내는 매뉴얼도 불성실한 [[콤모두스]]나 즉흥적으로 업무 결정을 내리고 그리스 일대에 있어 편향적으로 대한 [[네로]]는 당대 로마인들에게 가루가 될때까지 두고두고 빻일 수 밖에 없었다. 이중 콤모두스는 그 경우가 심각했는데, 친정을 한다면서 서신 담당관과 개인비서에게 매뉴얼조차 잘 지내라, 좋은 시간이나 보내라로 짤막하게 보내라고 했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없는 시간까지 쪼개어 국정을 돌봤던 황제로, 말도 안 되는 보고서와 편지이더라도 성실히 모두 답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행정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 일일이 법으로만 해결하기 보다는 그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 있게 해결하도록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유연하고 지혜로운 모습도 많은 행정가였다. 이는 서기 [[110년]] 플라니우스가 보낸 기독교도 처리 문제에 관해 황제가 직접 답변한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트라야누스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후대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로 칭찬받을 정도로 매우 상식적이고 공정하게 플리니우스에게 조언했다. 또 트라야누스는 플라니우스를 비롯한 총독, 관료들에게 마구잡이식 처벌을 피하고, 모든 소송 절차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정을 처리하면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익명의 밀고자들은 무시하라는 단호한 답변을 보냈다. <서한집>에 따르면,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는 플라니우스에게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법을 따르면서도, 마구잡이식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에는 기독교 교세가 약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까지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국가 제례를 거부하던 기독교를 사회 불안요소로 보았기에 이전에는 탄압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 연간에도 기독교인임이 드러나면 처벌을 받았다. 대표적인 순교자가 110년경 처형당한 안티오키아 주교 성 이냐시오(이그나티우스)를 들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