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란실바니아 (문단 편집) === 바나트(Banat) === 바나트 지방은 옛 헝가리 왕국의 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부의 무레슈강과 서부의 [[티서강]] 남부는 도나우강으로 둘러쌓여있고 동부는 트란실바니아와 접하고 있는 정방형의 지역이다.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 중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으로부터 가장 마지막에 탈취한 지역이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당시 합스부르크에게 넘어간 헝가리 영토 중 유일하게 오스만령으로 남아있다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어갔다.] 최후까지 전쟁터가 된 곳이기 때문에[* [[사부아 공자 외젠]]이 오스만군을 격파한 [[대 튀르크 전쟁#s-3.8|젠타 전투]]가 바나트에서 벌어졌다.] 황폐화되어 버려진 인구 공백지가 많았다. 이곳을 수복한 오스트리아는 지역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전후 재건을 겸사하여 민족 구성을 복잡하게 하여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견제하려했다는 견해도 있다.~~[[아크튜러스 멩스크|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헝가리놈들도 이 땅을 가질 수 없다!]]~~] 바나트 지방의 주요 구성민족은 루마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을 피해 도나우강을 건너 이주해온 [[세르비아인]], 그리고 독일인과 헝가리인이 거주했었다.[* 그 외에도 바나트 [[불가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 그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볼 수 있는 온갖 민족이 죄다 이주해서 뒤섞여 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제국]] 안의 작은 합스부르크'''라 불릴만큼 민족구성이 복잡했다.] 1차 대전 종전 직전에는 [[프랑스군]][* 프랑스 동방군(Armée d'Orient). 발칸반도에 파병되어 동맹국을 상대로 [[그리스 왕국]] 및 [[세르비아 왕국]]과 루마니아의 잔존병력과 함께 싸웠다.]과 함께 세르비아군이 바나트 전역을 점령했다. 곧 이어서 누가 바나트를 차지할 지를 두고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종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개칭한 상태였다.]간의 갈등이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바나트를 선점한 유고슬라비아는 바나트 전역을 합병하려 했고, 바나트의 루마니아계가 세르비아계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루마니아 역시 바나트 전체를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가 중재에 나서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간에 바나트를 분할했다. 세르비아계가 주류인 서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류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동부를 이루고 있고, 바나트의 중심 도시인 [[티미쇼아라]]를 포함한 동부는 루마니아 왕국에 합류했다.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는 서로 별개의 지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전근대 이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바나트 지방의 일부 또는 전체를 점유하기도 하고, 근현대 들어서는 트란실바니아 출신 루마니아계 인텔리가 바나트에서 민족운동을 이끌기도 하는 등 둘이 인접한 지역이다 보니 영향을 꽤 주고 받기는 했다.] 바나트라는 지방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꽤 큰편이다.[* 전간기에는 아예 바나트를 독립시켜서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중 어디에도 포함 되지 않는 중립 완충국가화 시키자는 의견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제기 됐다. 바나트 주민 대부분이 독립국 보다는 루마니아나 세르비아에 합병되는 걸 선호해서 무산 됐지만 아예 독립시키자는 의견이 나올만큼 바나트의 고유의 지역 정체성이 어느정도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바나트의 상징은 사자인데 루마니아의 국가 문장에는 트란실바니아와 별도로 바나트의 문장이 포함되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