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로이 (문단 편집) === 고고학에서 (트로이 유적) === ||<-3><#000><:>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3> 이름 || 한국어 || 트로이 고고 유적 || || 영어 || Archaeological Site of Troy || || 프랑스어 || Site archéologique de Troie || |||| 국가·위치 || [[튀르키예]] 차낙칼레 도 || ||<-3> [include(틀:지도,장소=Trojan Ruins 17100 Kalafat Köyü/Çanakkale Merkez, 높이=224px, 너비=100%)]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8년]] || |||| 등재기준 ||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vi)[*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849|849]]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2255906203_9f207f4937.jpg]] ||[[파일:external/www.ancient-wisdom.com/troy-today-map.jpg|width=100%]]|| || 역대 트로이 유적과, [[트로이 전쟁]] 당시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트로이(troy VI)의 모습 || [[파일:Aerial view of Troy.jpg|width=700]] 흔히 트로이 발견 과정을 두고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남자가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거짓'''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튀르키예의 히사를륵 언덕(Hisarlık Tepesi)[* 여담이지만, 이 지명은 [[터키어]]로 '성채를 세울 만한 언덕'이란 뜻이다. 유적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발굴 전에도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구전이 지역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한다.]을 답사한 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때 슐리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였다. 슐리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슐리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고[* 즉 슐리만 혼자만이 어릴 때의 꿈을 간직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캘버트와 슐리만 이외에도 트로이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슐리만이 히사를륵 지역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캘버트의 말을 들은 후'''였다. 널리 알려진, 슐리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륵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리만 본인이''' 퍼트렸다. 사실 슐리만은 유적 발굴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적도 있고, 트로이 발굴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들통난 일이 있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고, 트로이 발굴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나 그 이면에는 '''이러한 사기행위'''도 있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Plan_Troy-Hisarlik-tr.svg.png|width=100%]]|| || 사진에서 분홍색이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로 추정되는 트로이(troy VI) 유적이다. || 또한 흔히 알려진 이야기에서 대전쟁의 흔적을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일리아스]]》가 실제 역사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10년 동안이나 싸운 대전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언가 충돌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그 정도의 전쟁 흔적은 다른 유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수준이며, 이 트로이 유적에서도 '''여러 층에서''' 발견된다. 이 탓에 학자들은 어느 층의 전쟁이 '《일리아스》'의 모델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영화 《[[트로이(영화)|트로이]]》에서도 반영해서 영화의 무대가 되는 《[[일리아스]]》의 트로이가 있고, 해안이나 도시 주변에 훨씬 고대에 지어진 유적들이 다수 있다.] 슐리만이 점찍은 '대전쟁의 흔적'은 트로이 전쟁의 후보일 수 없다고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발굴한 것은 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500년경) 유적(위그림의 트로이 2)으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200-기원전 1100년 무렵)의 도시로 본다. [[파일:트로이 터키 1기.jpg|width=760]] [[파일:트로이 터키 2기.jpg|width=760]] 슐리만이 트로이 전쟁 기의 유적으로 착각한 트로이 1기와 2기의 성벽 즉 슐리만이 트로이가 있었던 곳을 발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아닌 그 천몇백 년 전의 유적이었던 것이다. 전기 청동기 시대나 후기 청동기 시대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아직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벌일 만한 사회구조에 도달하지 못했다. 더구나 연대상으로도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와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는 무려 1,300~1,400여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걸 한국사로 치면 대략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 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된 21세기와 진짜 [[신라]] [[선덕여왕]]이 살았던 시대 정도 차이가 난다. 또한 고고학에서 발굴을 할 때 가장 윗층(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층)을 1번층이라고 명명하고, 아래층들은 2번 3번 등으로 숫자를 매긴다. 그런데 슐리만은 이런 원칙을 몰라서 자신이 트로이라고 생각한 층을 1번층으로 지정했다. 이 때문에 가장 근대에 있는 층이 8번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슐리만이 찾았던 트로이가 1번층이었는데, 1번층 아래에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되자 슐리만의 트로이는 2번층으로, 최상위층이 9번층이 되어서 지칭하기가 헷갈리는 문제가 생긴 탓에 여러 고고학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더욱 난감한 점은,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을 위해서 그 윗층에 있는 유적들을 파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성벽이라고 생각하고 '''파괴한 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의 성벽이었다'''. 그나마 그 아래층의 유적과 겹치는 곳 일부만 부수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파일:트로이 터키.jpg|width=800]] 슐리만이 그토록 찾던 --그리고 역설적으로 파괴한-- [[트로이 전쟁]]기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트로이 6기의 성벽 물론 슐리만과 캘버트가 해당 유적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단정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트로이 유적에는 고대의 5개 시대의 유적이 중첩되어 있다. 가장 위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며, 그 아래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고, 그 아래의 유적층이 바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이며, 그 아래층이 [[청동기 시대]]중기~후기의,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이고 현재기준으로는 그 밑에 또 위의 그림에는 없는 후기 석기시대~청동기 초기의 트로이가 있다.(일명 트로이 0) 물론 각각의 시대 역시 여러 층(위의그림기준 트로이 1~5가 청동기 초기 시대, 트로이6가 청동기 중기 트로이7이 청동기후기~그리스 암흑시대, 트로이 8이 그리스 시대, 트로이9이 로마시대) 으로 이루졌고, 그 사이사이에는 [[전쟁]]이나 [[해일]] 등으로 인한 여러 파괴의 흔적이 있다. 이들 여러 파괴의 흔적들 가운데 중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트로이 전쟁의 흔적일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전체가 큰 화재에 휩쓸린 흔적이 있고, 도시 곳곳에서 '''그리스제''' 화살촉과 창날 등 무기가 흩어진 모습이 발견되는 등, 다른 파괴의 흔적과는 달리 전쟁에 의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슐리만은 이 중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도시 아래쪽에 있는 도시를 포함한 층, 즉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를 포함한 층을 시대 순서로 미루어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래층이 《일리아스》의 트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슐리만이 [[미케네]]를 발굴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미케네의 사자문을 발견해서 복원한 지 30년 이상 지난 뒤 일이었다. 미케네 발굴에 많은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트로이와 달리 미케네는 그 위치가 잊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누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한 뒤 후속 연구에 따르면 몇 차례 파괴되어 몇 번이고 다시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진에 무너지고, 전쟁에 파괴되는 등 말도 아니게 고생을 한 도시이다. 슐리만이 발굴했을 때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혹자는 초등학교 교정 쯤 되는 크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연구가 더 진행된 결과 슐리만이 발견한 유적은 그가 원하던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옛 유적이었고,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슐리만이 찾아낸 것의 크기의 17배쯤 된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약 20만 제곱미터[* 이것도 제곱킬로미터로 환산하면 0.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 20만 제곱미터는 6만 5백 [[평]]쯤 된다.]로, 직사각형이라 치면 400×500미터쯤 되는 크기다.[* [[덕성여자대학교]]보다 작은 면적으로 기숙사가 붙어있는 규모가 좀 큰 중고등학교만 한 면적이다.] 다만, 슐리만이 이 유적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지역은 [[갈리폴리 전투]]의 주전장이 되었을 테니[* 터키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차낙칼레 전투'''라고 부르는데 차낙칼레는 이 지역을 포함한다. 다만 갈리폴리 전투의 주 전장은 트로이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자칫하면 전쟁으로 유적이 사라질뻔했지만 이 발굴로 인해 트로이가 발굴된 쪽을 피하여 전투가 진행 되었으니 트로이 보존에 있어 슐리만의 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