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르나바 (문단 편집) == 역사 == 1211년 처음 언급되며, 1238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로부터 도시 헌장을 받았다. 1541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관구장이 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왕령 헝가리의 주요 도시로 급부상했으며, 1541~1699년 [[오스만 제국]]의 수탈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이 이주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16~17세기까지는 합스부르크 왕령 헝가리 반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에는 [[보치커이 이슈트반]], [[베틀렌 가보르]], [[라코치 지외르지 1세]], [[퇴쾨이 임레]] 등 나중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작]]이 되는 헝가리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반합스부르크 운동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합스부르크 투쟁은 트르나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1704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트르나바 근교에서 [[황제군|합스부르크 제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공고해졌다. 1635년에 [[예수회]]에서 설립한 트르나바 대학교는 반종교개혁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학이었으나 슬로바키아 교육과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학교를 설립한 파즈마니 페테르 대주교는 [[슬로바키아어]]의 사용을 장려하였고, 자신의 설교 일부를 슬로바키아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트르나바는 슬로바키아 민족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초 대학교가 [[부다페스트]]로 이전하고, 대주교 관청도 에스테르곰으로 복귀하면서 이전에 비해 중요성은 떨어졌다. 1844년 브라티슬라바와 연결되는 철도가 연결되었고, 철도의 연결과 동시에 설탕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이 주권 상당부분을 회복하면서 슬로바키아에 헝가리화를 시행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슬로바키아 문화를 지킨 도시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성립되었을 무렵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다. 197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트르나바를 슬로바키아 대교구 교구장으로 지정했으며, 이로써 교회 행정 측면에서도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이후 1996년 설립된 트르나바 주의 주도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