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문단 편집) ==== 스페인의 지배 (1510-30년) ==== ||[[파일:트리폴리 지도.jpg|width=400]]||[[파일:트리폴리 구시가.jpg|width=785]]|| || 16세기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나오는 타라불루스 || 16세기에 보강된 구시가지의 성문 || 15세기 말엽 [[나스르 왕조|그라나다]]의 멸망 후 북아프리카로 축출된 무어인들은 스페인 일대에 대한 해적질로 보복에 나섰다. 타라불루스는 그 거점들 중 하나였고, 이에 1510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도시의 공격을 결심하였다. 그해 6월 준비를 마친 1만 5천의 병력은 승선하여 페드로 나바로의 지휘 하에 시칠리아를 거쳐 몰타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5척의 갤리선과 합류하고 몰타인 안내자를 대동한 함대는 7월 20일 몰타를 떠나 4일 후 타라불루스 앞바다에 당도하였다. 성 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 아침, 아라곤 군대는 양분되어 반은 도시를 공격하고 반은 혹시 모를 오스만 함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6천 병력의 수륙 양면 공격에, 타라불루스 수비대는 3시간의 치열한 시가전 후 항복하였다. 길지 않은 전투였지만 도시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약 2만여 주민들 중 5천여 명이 전투 도중 살해되었고, 5-6천여는 노예로 전락하였다. 특히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노예가 되어 시칠리아로 보내졌고,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서쪽의 잔주르, 동쪽의 타주라로 피신하였다. 반면 아라곤 측은 겨우 3백여 전사의 피해만을 입었다. 전투 후 노예로 지내던 170여 명의 기독교도들이 해방되었다. 한편 주민들이 모두 죽거나 떠나거나 노예가 되자 도시는 한산해졌다. 스페인 당국은 각지의 기독교도들에게 이주를 권장하였고, 그게 효과가 없자 인근으로 떠났던 무슬림 주민들에게 복귀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국은 화해의 뜻으로 시칠리아로 추방되었던 셰이크의 귀환도 허가했으나 그럼에도 도시로 돌아온 이들은 극소수였다. 스페인의 행정력도 도시에서 15km 이상을 넘지 못하였다. 현지인들의 탈환 시도도 이어졌다. 1512년 [[바르바리 해적]]들이 공격하였고 3년 후 [[바르바로사]]가 [[알제]]를 수복하였다. 당국의 초청으로 돌아왔던 셰이크 역시 1526년 타주라로 도주하였고, 그곳은 스페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주요 저항 거점이 되었다. 스페인 인들은 도시의 성벽을 보수했으나 그외에 방어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타라불루스 유지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무슬림들의 회피로 타라불루스의 교역은 쇠퇴하였고, 타주라가 새로운 교역 중심지로 대두되었다. 노예 수입의 관세를 제외하곤 별 이익을 보지 못하던 스페인 측은 국왕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의 윤허 하에 오스만 제국에게 본거지 [[로도스 섬]]을 상실한 [[구호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에게 도시를 봉토로써 (몰타와 함께) 할양하였다. (1530년 3월 23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