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문단 편집) ==== 구호기사단령 (1530-51년) ==== ||[[파일:트리폴리 성채 2.jpg|width=490]]||[[파일:트리폴리 성채 3.jpg|width=490]]|| |||| 기사단이 도시 성벽의 강화와 함께 옛 로마 공중 욕탕 자리에 세운 산 피에트로 성채 |||| 그에 따라 기사단은 1530년 7월 25일 타라불루스를 접수하였다. 기사단은 몰타 섬의 비르구에 본부를 차렸고, 타라불루스에는 총독을 파견하였다. 첫 총독이던 가스파르 드 상케사는 인근 부족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그들은 냉대로 일관하였다. 동쪽 타주라에선 1531년부터 오스만 측 기지가 마련되어 지휘관 카이르 앗 딘 휘하의 병력이 주둔하며 현지인들의 저항을 도왔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1530년대 초엽 피렌체 출신 군사 기술자 피키노가 타라불루스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무렵 타주라의 태수 아이든 레이스가 타라불루스 성벽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엘 카디 요새를 지었는데, 1536년 경 총독 게오르그 스킬링에 의해 점령된 후 파괴되었다. 1539년 3월 도시에 대한 분석을 위해 파견된 기사 파울 시메오니는 그해 6월 몰타로 돌아와 기사단과 타주라 병력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타라불루스의 방어력 강화를 위한 자금이 부족했던 기사단은 때때로 성벽을 허물고, 항구를 메운 후 도시를 포기하자는 고민을 하였다. 다만 1540년대 들어 카를로스와 [[술레이만 1세]] 간의 휴전이 체결됨에 따라 타라불루스에 대한 오스만 측의 위협도 격감되었다. 1546년에는 후에 몰타 공방전으로 유명해진 노장 장 드 발레타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트리폴리타니아 전역 지배를 꿈꾸던 그는 도시의 행정을 개혁, 성벽을 보강하곤 기사단의 본부를 타라불루스로 이전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비록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중재안으로 몰타가 본부로 남되 타라불루스로 기사들이 증원되었고 그 총독은 기사단장과 맞먹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외에 총독은 기사단의 8개 언어권에 따라 숙소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라불루스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도시의 새로운 방어 시설 설립을 위한 자금인 7천 스쿠디를 실은 갤리선 라 카타리네타가 오스만 제독 투르굿에게 나포되며 물거품이 되었고, 상심한 장 드 발레타는 1549년 도시를 떠났다. [[파일:트리폴리 1551.jpg]] 1551년 오스만 군대의 트리폴리 정복 그리고 1551년 초엽 술레이만 1세는 타라불루스 점령을 명하였다. 1551년 7월 시난 파샤와 투르굿이 이끄는 오스만 함대는 우선 몰타를 공격, 고초에서 수천의 포로를 사로잡은 후 8월 초엽 타라불루스를 포위하였다. 오스만 육군은 3개의 포대에 12개의 대포를 포위망에 설치하였다. 불과 4달 전에 부임한 총독 가스파르 드 발리에는 30명의 기사들과 630명의 이탈리아-시칠리아 용병들로 구성된 수비대를 이끌고 싸웠다. 한편 포위 도중 프랑스의 대오스만 특사인 가브리엘 다라몽이 2척의 갤리선과 갤리엇을 대동하고 오스만 진영에 합류하였다. 그는 몰타 기사단장의 요청으로 프랑스-오스만의 대합스부르크 동맹에 있어 기사단이 걸림돌이 아니므로 포위 중단을 설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시난 파샤와 투르굿은 기사단을 아프리카 해안에서 일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다라몽은 코스탄티니예로 향하여 술탄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겁박, 이에 그들은 포위가 끝날 때까지 일대를 떠나지 못하도록 막음. 그럼에도 카를로스와 교황은 그가 오스만 측을 부추겼다고 비난. 실제로 승리 만찬에 참여하긴 함. 당시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진 터라 더 민감한 것도 있었다.] 포위는 2주간 지속되었고, 시난 파샤에 의한 6일 간의 포격 끝에 성채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가스파르는 협상에 나섰고, 안전한 철수를 대가로 8월 15일 항복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가스파르를 위시하여 대부분 프랑스 인이었던 기사단원들을 몰타로 실어날랐다. 나머지 수비대 중에선 2백여 명을 제외하곤 노예가 되었고, 특히 기사단 휘하에서 복무한 무슬림 보조병들은 처형되었다. 몰타로 돌아온 가스파르는 기사단장 후안에 의해 면박당하고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직위해제 당하였다. 오스만 령이 된 타라불루스에는1536년부터 타주라의 오스만 지휘관을 맡고 있던 아가 무라트 파샤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기사단은 1552년 트리폴리타니아 해안을 습격하는 등 보복하였고, 그 후로도 몇 차례 도시를 수복하려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타라불루스는 1912년 리비아 전쟁 시까지 (가끔은 명목상으로나마) 오스만 제국령으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