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 ==== [[파일:트리폴리 사원 4.jpg|width=700]] 시디 드라굿 모스크. 트리폴리의 첫 오스만 양식 사원이다. 포위를 주도했던 투르굿 레이스는 1556년 3월 타라불루스의 베이 (후에는 파샤)로 봉해졌다. 그는 성벽을 보강하고 포대 (다르 엘 바루드)를 세웠고 항구의 산 피에트로 성채를 투르굿 성채로 명명, 보강하였다. 같은해 12월 투르굿은 현 튀니지 중남부의 가프사, 1558년 타라불루스에서 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가르얀을 점령하였다. 그후에는 예니체리 부대를 이끌고 베니 울리드를 격파, 제르바 섬과 [[미스라타]]를 영지에 더하였다. 투르굿의 노력으로 도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요새화된 항구 중 하나이자 바르바리 사략선의 주요 기지가 되었다. 한편 1557년 기사단장으로 부임한 장 드 발레트는 자신이 아끼던 도시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1559년 타라불루스 원정군이 조직되었고, 기사단의 사주로 도시에선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투르굿은 신속히 이를 진압하였고, [[메시나]]에서 나포한 기사단 선박의 포로들로부터 원정 계획을 알아낸 후 타라불루스로 돌아와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같은해 그는 이탈리아의 레지오를 공격, 전 주민을 노예로 삼아 귀환하였다.] 몰타 기사단은 이듬해 스페인 군과 함께 제르바를 공격했으나 투르굿의 반격에 대패하였다. 이로써 타라불루스 원정도 흐지부지 되었고. 투르굿은 도시를 근거지 삼아 이탈리아 해안에 대한 습격을 이어갔다. 그는1565년 몰타 공성전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할 때까지 총독위를 유지하였다. 사후 그의 유해는 1560년 기사단 시절 교회를 개조한 시디 드라굿 사원에 안장되었다. 투르굿 파샤는 재임 기간 동안 많은 건축을 통해 타라불루스를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두드러진 도시로 변모시켰다. 비록 그의 궁전은 사라졌지만 근처의 시디 드라굿 사원 및 영묘와 부속 하맘 (욕탕) 단지는 밥 알 바흐르 부근에 현존한다. 9년에 불과한 재임기에도 불구하고 투르굿은 타라불루스는 반세기 간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경제적 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임인 울루츠 레이스[* 본래 투르굿의 유해를 안장하러 타라불루스에 들렸다가 그대로 파샤로 눌러 앉았고, 쉴레이만 대제의 책봉을 받는다. 다만 3년만에 알제로 전근되었다.] 때에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는 제르바에서 바르카 ([[벵가지]] 고원)의 영역으로 확정되었고, 이는 현대 리비아의 밑바탕이 되었다. [[파일:트리폴리 고지도.jpg|width=700]] 영국인 학자 존 셀러가 묘사한 1675년의 트리폴리 오스만 정복 이후 타라불루스는 재차 바르바리 해적들의 기지와 기독교도 노예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1675년 존 나르보러의 영국 해군이 항구를 공격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타라불루스의 파샤들은 해적들의 공격에 대한 면제를 대가로 유럽 상선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한편 외부에서 임명된 파샤들 대신, 전반적인 행정의 집행을 담당하며 현지화 되어가던 예니체리 부대의 장교 (베이)들이 종종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점차 파샤들은 예니체리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16세기 말엽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17세기 중반 사키즐리 오스만 파샤가 1631년부터 무려 41년간 재임하며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1672년 이후로 39년간 19명의 총독들이 난립하는 더 큰 혼란기를 겪었다. 한편 [[대튀르크 전쟁]]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18세기 들어 내분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