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문단 편집) === 고대 (오에아) === [[파일:트리폴리 유적.jpg|width=800]] 게니우스 콜로나이아 신전의 정면부 유구. 트리폴리 박물관 소장 기원전 6세기, 항구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춘 입지에 주목한 페니키아 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지명은 오야트였고, 현대 구도심 자리에 도시가 지어졌다. 이후 [[키레나이카]]의 그리스 인들이 지배하였고, 희랍어인 오에아 (Ὀία)로 지칭되었다. 다만 기원전 4세기 무렵 같은 페니키아 식민도시로 출발했지만 해상 제국으로 성장한 [[카르타고]]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로마령 아프리카 속주의 일원이 된 오에아는 서쪽 50여 km의 사브라타와 동쪽으로 90여 km 떨어진 [[렙티스 마그나]]와 함께 레기오 시르티카 (Regio Syrtica)로 편성되었다. 이는 200년 경에 레기오 트리폴리타니아 (Regio Tripolitana), 즉 세 도시들의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현지 출신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아프리카 속주에서 독립적인 주로 승격되었다. 당시만 해도 세베루스의 출생지인 렙티스가 가장 큰 도시였다. 다만 그가 베르베르 및 반달족의 약탈로 쇠퇴하고, 결정적으로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오에아는 트리폴리타니아의 군사/행정의 중심지로 선택되며 중세에 쇠락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일대의 중심으로써 지속적으로 큰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한편 그렇게 지속적인 인간 거주로 인해 수세기에 달한 로마 지배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유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과 작은 신전의 일부가 유일하다. 유적의 기둥과 돌들은 주민들에 의해 후대의 건물들에 재활용 되었고, 그러한 재창조는 과거 유적의 파괴를 수반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까지도 발굴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팍스 로마나]] 하에 번영하던 '트리폴리타니아'[* 남쪽 산악 지대에 리메스 트리폴리타누스라는 일련의 요새들이 지어져 해안 도시들을 사막 유목민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였다.]는 5-6세기 서로마 제국의 쇠퇴로 촉발된 혼란 및 반달 족의 침공과 함께 쇠퇴하였다. 430년대부터 일대는 반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533년 봄에 트리폴리타니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키레나이카의 동로마 군대가 일대를 접수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수복 원정의 시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수복된 오에아에 현지 베르베르 인들을 위한 교회를 건설하고 성벽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도시는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트리폴리타니아는 이전처럼 독립된 주가 아닌 동로마령 아프리카 총독부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한편 로마 시대에 [[베르베르어]] 등 현지 언어가 섞인 [[페니키아어]]를 사용하던 주민들은 6세기 무렵에 이르면 대부분 베르베르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라틴어 사용자는 소수 관리층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다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아랍어가 빠르게 보편화되었고, 그 결과 9세기부터 오에아는 '트리폴리스'의 아랍어 발음인 타라불루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