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빌리시 (문단 편집) == 역사 == 동(東) 이베리아 왕조[* 스페인의 이베리아Iberia 반도와 알파벳 철자가 똑같아 혼동되지 않도록 영어로는 "캅카스 이베리아(Kavkaz Iberia)" 혹은 I'''v'''eria로 표기됨]의 수도였던 [[므츠헤타]] 근처에 위치한 트빌리시는 전설 상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5세기 무렵 건설되었다 한다. 6세기 초 이베리아 왕조는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천도하였다. 천도한 지 몇십년 되지 않아 도시는 전란에 휩싸이며 정신없는 세월을 보낸다. 6세기 말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쟁터가 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트빌리시는 한동안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에는 [[하자르 칸국]]이 도시를 접수했다. 737년경 [[우마이야 왕조]]가 이 도시를 정복하고 트빌리시는 아랍 무슬림 토후들이 다스리게 된다. 당시 아랍 무슬림 사회는 과학과 교역이 발달한 선진 사회였기에, 트빌리시 시도 교역이 발달하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베리아인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곧 도시에 수많은 무슬림 상인들이 정착하면서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으로 채워졌다. 11세기 후반 무렵 도시는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정복당한다. 12세기 초 조지아인들이 다시 트빌리시를 탈환하고 조지아 왕국의 수도를 쿠타이시 시에서 다시금 트빌리시로 옮겼다. 중세 조지아 왕국은 트빌리시를 탈환하고 번영을 누리며 황금시대로 기억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수도 트빌리시는 인구 10만에 달하는 중동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자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오늘날 트빌리시의 쇼타 루스타벨리 거리가 [[타마르]] 여왕[* 히브리어에서 대추야자라는 뜻인데 오늘날에는 "타마'''라'''"라는 이름이 조지아인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의 치세 하에 민족 서사시를 서술한 조지아인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 1172 ~ ?, [[예루살렘]]에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 벽화에 그의 그림이 있었으나 2004년 반달당해 조지아에서 이스라엘에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를 기념하는 의미로 명명되었듯, 조지아인들은 당시를 조지아 최고의 전성기로 추억하는 듯 하다. 전성기의 조지아 왕국도 13세기 몽골군의 침략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몽골군의 침략을 시작으로 조지아의 황금 시대는 끝이 나고, 트빌리시 도시 또한 수백년동안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몽골인들은 조지아인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조공을 요구했으며, [[일 칸국]]에 납부할 세금 때문에 조지아인들은 기근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1366년에는 기근으로 고통받던 도시에 전염병이 퍼져서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1386년에는 [[티무르]] 제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시가 다시 한 번 약탈당했다. 16세기에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트빌리시를 봉신국으로 삼았다. 다시금 트빌리시는 주요한 무역 거점으로 부상하며 도시의 많은 부분이 재건축되고 복구되었다. 오늘날의 트빌리시 구시가지는 바로 사파비 왕조 시절에 기반이 잡힌 것으로, 주민들은 자신의 종교에 따라서 아제르바이잔인 무슬림 구역,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위치한 [[아르메니아인]] 구역, 정교회 성당이 있는 조지아인 구역, 유대인 구역에 나뉘어 살았다. 이러한 구역들과 종교 시설들은 오늘날 트빌리시 구시가지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1801년 러시아인들이 카프카스에서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제압하고 트빌리시를 수중에 넣었다. 조지아인들처럼 [[동방 정교회]]를 믿었던 러시아인들은 정교회 성당들을 대대적으로 증축, 보수하고 이슬람 사원 상당수가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트빌리시는 러시아인들에게 이국적인 고대 기독교 왕국의 도시로 각인되었으며, [[푸쉬킨]]이나 [[레르몬토프]]의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트빌리시와 보르조미[* 쿠타이시 근처의 온천도시. 현재도 동구권에서는 보르조미 생수를 고급 약숫물로 취급한다.] 온천에 요양하는게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비옥한 조지아 땅에서 생산된 와인과 중동에서 도입된 조지아의 [[바클라바]] 과자 등도 러시아 상류층에게 인기 품목이었다. 오늘날에도 트빌리시에 비즈니스가 아닌 순수 관광 목적으로 방문하는 관광객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구소련권 관광객인 건 이런 이유가 있었다.[* 트빌리시의 라이벌 도시 [[바투미]] 시 같은 경우에는 위치 때문에 종종 튀르키예인 관광객이 더 많을 때가 있다.] [[파일:tbilisi_opera_and_ballet_theater.jpg]] 트빌리시 오페라 하우스 내부의 인테리어. 유럽과 중동의 교차로이던 트빌리시의 이미지를 잘 반영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트빌리시는 잠시 러시아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지만 1921년 다시 [[소련군]]에게 장악당했다. [[스탈린]]의 [[대숙청]] 및 전시경제체제로 트빌리시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트빌리시 시내 조지아 국립 역사 박물관 2층에는 소련 시절 조지아인들이 겪었던 수난 관련한 기록물들이, 러시아인 관광객들 눈에 띄지 않게 분리된 구역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다만 소련 시절이 조지아인들에게 완전 흑역사는 아니었던게 트빌리시에 주재하던 러시아인 관료들을 위해서 건설되었던 여러 극장들은 소련 시절이 되자 [[조지아어]]로 된 작품들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실시한 의무교육 덕분에 조지아인 식자층이 증가하고 소련에서 어느 정도 민족어 사용을 허용함에 따라서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