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역사 (문단 편집) == 티베트 독립시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티베트(1912~1951))] 여하튼 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달라이 라마 13세]] 툽뗀걈초는 청이 멸망하자 1913년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중국과 세계에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정부는 [[네팔]], 영국, [[부탄]] 등과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로서 몇몇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영국은 심라 협정으로 내외몽골처럼 티베트를 분할하여 외티벳(서티베트)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내티벳(동티베트)은 중국령 티베트(사천 서부 서강, 청해, 운남, 감숙의 티베트지구)로 삼는 타협을 권했으며, 한편으로는 티베트를 인도 지역 이권 수호를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무기를 지원해주고 영국 공관을 설치, 공사를 파견하였다. 1914년 티베트 정부는 영국령 인도제국과의 국경을 [[맥마흔 라인]]으로 확정하였다.[* 이는 이후 [[중인전쟁]]의 원인이 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역시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여기고 있었지만 당시 [[군벌/중화민국|청말민초의 난세]]로 티베트에 세력을 뻗칠 여유가 없어 종주권 주장만 할뿐이었다. 중화민국은 쓰촨성 서부를 포함한 캄 지방에 [[시캉성]](西康省;서강성)을 설치하였고 그 일대를 지배 중이던 류원후이를 시캉성장으로 임명한다. 류원후이를 이용해 티베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시캉성은 [[중국 공산당|중공 시대]]에 금사강 서안은 [[티베트 자치구]]로, 동안은 [[쓰촨성]]으로 편입되며 해체.] [[만주사변]]이 발생하며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기 바쁜 중앙이 티베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자, 1932년 달라이라마 13세가 군대를 이끌고 [[류원후이]]의 시캉성과 [[마부팡]]의 칭하이성을 공격, [[중국-티베트 전쟁]]이 발발한다. 티베트의 영역인 암도와 캄을 탈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티베트군은 잠시 우세하나 싶었으나 류원후이군, 마부팡군, 그리고 마부팡을 진압하러 온 후쭝난의 중앙군 제1사단의 합동공격에[* 왜 마부팡을 진압하러온 군대와 마부팡의 군대가 합작을 했나 의문이 들 것이다. 이는 마부팡의 생존 계략이었는데 마부팡은 후쭝난의 중앙군이 자신을 진압하러 오자 일부러 티베트 승려 폭행사건을 일으켜 티베트가 칭하이로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다음 티베트군에게 의도적으로 후퇴하여 중앙군이 남쪽에서 진군해오는 티베트군으로 신경을 돌리게끔 했다. 마부팡은 덕분에 중앙군의 침략을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다시 뒤로 밀려났고, 평화협상을 체결해 금사강을 티베트와 시캉의 경계로 하기로 했다.[* 시캉성 서부로 치던 금사강 서부를 티베트 영역으로 인정한다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의 경계만 금사강으로 정한 것.] [[중일전쟁]] 와중인 1940년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 뗀진걈초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한 후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티베트에 머무르게 하여,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영국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중 티베트 지역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해 은근히 이들을 괴뢰국처럼 대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