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파자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알제리 티파자 16.jpg|width=760]] 로마 시대 신전 유구 고대 [[카르타고]]의 무역항으로 세워졌고,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조성된 [[묘지]]가 남아있다. [[로마 제국]]에 들어 서기 3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티파사를 서쪽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정복을 위한 군사기지로 개발하였다. [[2세기]]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에 식민도시가 된 티파사의 정식 명칭은 콜로니아 아엘리아 티파세네시스였고, [[4세기]] 경에는 2만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로마시대 도시는 해안과 접한 3개의 언덕에 형성되어 있다. 중앙의 [[언덕]]에 밀집되어 있던 주택들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서쪽과 동쪽 언덕에 있던 3개의 [[바실리카]] ([[성당]]) 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서쪽 언덕에는 대성당과 알렉산드로스 성당, 동쪽 언덕에는 성 살사 성당이 있다. 그외에 서쪽과 동쪽에 각각 [[공동묘지]]가 있으며 [[목욕탕]], [[극장]], 경기장, [[분수]] 등이 있었다. 이러한 도시는 2.3km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372년]] 피르무스의 베르베르 반란 당시 인근 카이사레아와 이코시움이 함락당했을 때에도 버텨내어 후일 로마측 반격의 거점이 되었다. [[238년]]부터 흔적이 확인되는 기독교는 [[4세기]] 들어 주류가 되었고, 티파사는 북아프리카의 주요 기독교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고, 3개의 바실리카가 지어졌다. 바실리카 주변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석관들이 두르고 있었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성 살사 성당에 봉헌된 살사는 아직 기독교가 대세가 아니던 [[3세기]]에 거주하던 주민으로, 우상이라 여긴 신상의 목을 베어 [[바다]]에 던졌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그를 투석형에 처하여 죽이고 역시 바다에 던졌는데, 기적적으로 그 유해를 건져내어 옛 항구 옆의 언덕에 안장한 것을 기념하여 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430년]] 도시는 [[반달족]]의 침공 당시 약탈당하였고, [[484년]]에는 [[반달 왕국]]의 왕 [[후네리크]]가 티파사의 니케아파 [[주교]]를 축출하고 [[아리우스파]] 주교로 대체하자 많은 주민들이 아직 [[서로마 제국]]령이던 바다 건너 [[히스파니아]]로 이주하였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 이후 재건되었으나 [[7세기]] 말엽 [[우마이야 왕조]]의 [[마그레브]] 정복 당시 완전히 파괴되어 유적으로 남았다. [[아랍인]]들은 일대의 폐허를 '손상된'이란 의미인 테파세드라 불렀다. 이는 [[팔미라]]를 타드무르 '파괴된'이란 의미인 타드무르라 명명한 것과 비슷한 작명이다. 유적으로 남아있던 일대는 [[1857년]]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에 다시 도시로 개발되었고, [[1890년대]]에 본격적인 발굴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다만 [[21세기]] 들어 티파사는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신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