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견의원 (문단 편집) == 실상 == 혁명 기조와 전권을 위임받은 파견의원들은 거의 무제한한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질서를 바로잡고 군대를 억제하며 재건하는 데 효과가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월권과 권한 남용, 파견의원들 간의 다툼과 의원의 개인적인 착복이 나타나는 부작용도 있었다. 무엇보다 혁명적 광기와 편견, 혁명적 상황의 극단주의, 그리고 해당 구역 안에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으로 인하여 학살과 파괴를 극심하게 저질렀다. [[방데 전쟁|방데의 왕당파 봉기 진압]], 리옹 공성전, 툴루즈 학살 등 공포정치 시절의 화끈한 피바람의 대부분은 사실 파리에서가 아니라 분리주의와 반동 세력을 진압한답시고 파견된 이 파견의원들 아래 저질러졌다. [[공산권]]의 [[정치장교]]와 아주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 역사적인 관계로 보면 정치장교를 비롯한 후대 모든 정권의 군부 복속 정책의 시조라 봐야 한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들은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면밀하게 공부했으며 그 과정에서 '파견의원' 제도를 따 왔을 것이다. 결국 공화력 3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결국 파견의원 제도의 폐지로 의회는 군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이는 로베스피에르가 염려했던 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군사 엘리트]]에 의한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정권 탈취]]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정권 탈취의 주인공인 나폴레옹을 키워준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친동생과 나폴레옹과 함께 툴롱에 있었던 파견의원 살라세티라는 것이 함정이다. 로베스피에르와 파견의원 시스템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실전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