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프랑스) (문단 편집) == 기원과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Nd4jfE6MWNY)]}}} || 파리라는 이름은 고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유래되었다. 역시 여기서 유래하여 이탈리아어로는 파리를 파리지(Parigi)라고 부른다. 파리시족은 주로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Cité) 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테는 라틴어 'civitas'에서 왔으며, [[도시]]를 뜻하는 '[[시티]](city)'의 어원이다. 이때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오늘날 파리의 기원이다. [[로마 제국]] 당시에 이곳은 '루테티아', '루테티아 파리쇼룸(Lutetia Parisiorum; 파리시의 루테티아)'라고 불렸다. 현대 [[프랑스어]]로는 Lutèce(뤼떼쓰)라고 한다. 원소 이름 [[루테튬]]은 여기서 유래했다.루테티아라는 이름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늪', '습지'를 뜻하는 고대 켈트어 'luteuo-'에서 왔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쥐'를 뜻하는 'luco-'에서 왔다는 설이다. [[로마 제국]] 당시 루테티아는 시테 섬에서 시작해 센 강의 좌안 지역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며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티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 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졌고,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을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 후 파리는 상당 기간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 도시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테티아'라는 이름이 빠지고 '파리'라는 명칭으로만 불리기 시작했다.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점령했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엔 [[아헨]]이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인 [[외드]]와 [[로베르 1세]]를 더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센강의 우안 쪽으로 파리가 확장되었다. 989년 [[프랑크 왕국|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 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교]]가 발전하여 [[스콜라 철학|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 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다. 대표적인 대학 지역으로 꺄르띠에 라땅이 있다. 센 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잔 다르크 파리 공성전.jpg|width=100%]]}}}|| || {{{#f0f0f0 '''파리 공성전 당시 잔 다르크[br](Jeanne d'Arc, at the siege of Paris, 앙리 엠마뉘엘 펠릭스 필리포토(Henri Emmanuel Felix Philippoteaux) 작, 1858, 판화)'''}}} ||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를 처형한 건 잉글랜드군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늘날 파리에는 커다란 잔 다르크 동상이 세워졌다. 파리 시민들의 잔 다르크에 대한 속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강 유역(Val de Loire)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일례로 [[샤를 8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앙부아즈에서 태어나서 앙부아즈에서 죽었으며,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말년을 보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파리가 아닌 루아르 강 유역에 머물렀던 것이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앵발리드|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8LwRRBy.jpg|width=100%]]}}} || || {{{#fff 1615년 당시 파리. }}}[[성형 요새|{{{#fff 보방식 성벽}}}]]{{{#fff 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에서 강가 왼쪽 하단에 있는 자그마한 격자모양의 성채가 [[루브르|{{{#fff 루브르}}}]] 궁이고, 그 아래쪽으로 회랑처럼 길게 난 건물이 튈르리 궁이다. 지도 위쪽에 있는 네모난 성은 [[바스티유 요새|{{{#fff 바스티유 요새}}}]].}}} || 파리의 다른 별명인 '빛의 도시'는 [[루이 14세]] 때 붙여졌다. 당시 왕은 파리의 범죄를 줄이고자 한밤 중에도 거리를 환히 밝혔다. 이른바 [[가로등]]을 두기 시작한 것인데 이 덕분에 파리는 밤에도 밝았고 그로 인해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로등은 처음에는 촛불을, 이후에는 점차 가스등, 전기등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파리는 계몽사상의 중심지가 됐고 그때부터 '빛'은 말그대로의 빛과 계몽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불만거리였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왕가에 내건 조건 중 하나(3번 조건)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환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800px-Blason_et_ornements_ville_fr_Paris_(Empire).png|width=100%]]}}}|| || {{{#f0f0f0 '''제1제국 시기 파리의 문장'''}}} ||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로는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Georges-Eugène Haussmann, 조르주 외젠 오스만[* 한국어 철자가 같아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이 있나 오해할 수도 있으나 [[프랑스어]]로는 'H'가 묵음이라 한글 철자만 같을 뿐 관계없다.])이다. 이 사람은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을 넓은 불바르(Boulevard)로 바꾼다. 불바르는 [[가로수]]가 놓인 넓은 도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오스만 남작의 개조 사업을 논할 때 꼭 등장하는 단어이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 기반 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도시정비에는 공화 게릴라들의 준동을 막기 위함이라는 뒷사정도 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농성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프랑스 제2제국|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 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프랑스 제3공화국|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 왕국]]에게 항복하게 된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여 봉기하였지만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이때 코뮈니스트들의 의도적인 방화로 [[튀일리 궁|튀를리 궁전]], 서청, 정부, 법원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엑스포]]가 개최되었는데 1889 파리 엑스포를 기념하여 [[에펠 탑]]이 건설되었고, 1900 파리 엑스포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 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베네룩스]]를 공격하는 척하며 강력한 기동 부대를 아르덴 산맥으로 보내 연합군의 옆구리를 두 동강 내버린 후 프랑스 북부를 휩쓸며 베네룩스의 연합군은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빠져나가 독일군의 정면 공세를 막아낼 정규군이 없어지게 된 프랑스는 6월 10일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언, 독일군에게 6월 14일 저항 없이 내주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결정 덕에 파리는 독일군의 포화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앞선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던 것을 고려하면 파리를 사수하겠다는 결정을 했을 경우 현재의 파리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 그중 압권이 [[히틀러]]가 에펠탑에서 찍은 사진. 아직까지도 히틀러의 에펠탑 사진은 2차 세계대전 프랑스의 굴욕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히틀러가 에펠탑을 온다는 소식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프랑스 측에서 에펠탑의 전기를 끊어버렸다는 것도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독일 점령 하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 [navertv(43996879)]}}} || || {{{#fff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1부 - 운명의 3개의 도시 <파리.베를린.뉴욕>'''[* 영상 매체가 태어난 이후 20세기의 격동을 3개의 도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자료를 발굴하여 각각의 도시의 운명을 그린 다큐.][* 2018년 12월 8일 방영.]}}} ||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 한국군 기준 [[중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Is Paris Burning?)"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제목이 되었으며 게임 [[코만도스]] 2의 마지막 미션 제목도 'Is Paris Burning?'다.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국가경찰|경찰]]들은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7,000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 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쟁포로]]로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풀려나게 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 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 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 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콜티츠가 1966년 숨을 거두자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콜티츠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lovestory&no=39441|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Extreme Surprise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원래부터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계속 인구가 증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