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트리키 (문단 편집) == 쇠락 == 전쟁이 일상이나 다름없는 로마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려면 전장에 나아가 군공을 쌓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파트리키들은 군공을 세우기 위해 전장에 앞장서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수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트리키들은 양자를 맞이하는 방식으로 가문의 대를 이으려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공화정 후기에 무수한 가문의 대가 끊겼다. 급기야 기원전 1세기에는 파트리키가 거의 남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새로운 파트리키의 등록을 위한 특별법인 카시야 법(lex Cassia)을 도입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평민 출신이지만 출세를 거듭하면서 파트리키와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된 '평민 귀족'([[노빌레스]], Nobiles)이 대체했다. 이들은 본래 평민 출신이었기에 평민만으로 구성된 민회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하고 [[호민관]]으로 뽑히는 등 평민들의 대표자로 행세하면서도 잔존한 파트리키 가문과 거리낌없이 통혼하고 그들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사다리 걷어차기|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려는 움직임을 차단하는 데 있어 파트리키보다 더욱 열성적이었다.]] 한 예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전면으로 맞섰던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기원전 165년 집정관에 오른 노빌레스 계급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6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이었다. 또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훼방놓은 끝에 몰락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의 수호자" 칭호를 얻었다. 반면, [[포퓰리즘|평민의 지지를 등에 업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어서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원로원과 파트리키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으며,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마다 민회를 이용해 법을 통과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투표권을 확장하고, 빈곤을 구제하고, 농업, 식민도시, 곡물법 등 광범위한 복지 개혁을 추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법질서를 유린하고 정치테러를 서슴지 않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령,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자기가 밀어주는 후보가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하자, 추종자들을 시켜 집정관에 당선된 자를 살해해 버렸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폭동을 일으켜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목숨을 위협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영합해 술라가 가지고 있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버렸다가 술라의 로마 진군을 초래했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축출되었다가 도로 복귀한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과 함께 수많은 이를 살상했다. 이렇듯 파트리키와 영합하여 평민들을 위한 개혁을 저지하는 자들은 [[옵티마테스]], 평민들의 대표를 자처해 기존의 정치 판도를 뒤엎으려는 자들은 [[포풀라레스]]라고 일컬어진다. 파트리키 및 그들과 결탁한 노빌레스로 구성된 [[옵티마테스]] 파벌은 특정인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자신들의 영향력까지 위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가문이나 개인이든간에 동료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고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신참자가 자기들과 동격이거나 심지어 윗선에 서는 일, 누군가가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일 등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됐다. 공화국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급하여 집정관을 맡은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몇년간 일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원로원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진급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벼락 출세하여 위세를 떠는 [[폼페이우스]]나 평민 출신으로서 7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수많은 귀족을 해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로서 마리우스의 뒤를 따르겠다는 뜻을 대놓고 드러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경계대상이었다.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쿰 속주를 동시에 맡고 6만에 달하는 병력을 10년씩이나 이끌었다. 이는 한 개인이 누리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이었다. 그런 자가 마리우스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카이사르를 어떻게든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를 부추겨 카이사르와 상대하게 해서 카이사르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카이사르의 내전|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난 뒤 자신과 맞서다가 항복한 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계에서 변함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그들은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맡아서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집정관을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한 대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꼭두각시로 전락한 것을 지켜보고, 카이사르가 종국엔 왕이 될 거라 여겼다. 특정인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그들로서는 이는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사태였다.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해방자'를 자처한 이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러나 [[해방자 내전|뒤이은 내전]]에서 해방자파가 카이사르의 후계를 자처한 제2차 [[삼두정치]]파에게 패하면서, 옵티마테스는 위세를 거진반 상실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후계자들끼리의 내전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교묘한 정략을 통해 공화정을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정인 독특한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파트리키 신분이지만 다른 가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버린 이들을 후원해, 여전히 로마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그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파트리키들이 공화정 시절로 회귀하기를 원했고, 후대 황제들은 이들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파트리키들이 숙청되어 명맥이 끊겼고, 권력은 황제의 권력에 기생하는 [[에퀴테스]]에 넘어갔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수립한 뒤, 왕정~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파트리키 가문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통혼해 명맥을 이었다. 그렇지만 대개는 아우구스투스 암살 미수, 티베리우스 암살 미수, 칼리굴라 암살 미수 및 [[칼리굴라 암살 사건]] 등에 연루되거나 사건 발발 후 누명을 쓰고 숙청되거나 몰락귀족이 되어 북이탈리아나 남이탈리아 시골로 쫓겨나면서 그 위세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네로]] 시대에 벌어진 [[소 아그리피나]]의 정적 제거,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전횡,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무고 재판, [[피소 음모]] 사건, 베네벤툼 음모 등 속에서 오래된 파트리키 가문들이 거진 피해를 입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네로 몰락 후 네 황제의 해를 거쳐 등장한 [[플라비우스 왕조]] 대에 이르게 된 뒤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아래에서 집중 견제를 받아 숙청이 네로 시대보다 가속화되고, 그 자리는 이들이 새로 파트리키 지위를 내려 원로원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속주, 식민도시 출신 신흥 귀족들 몫이 된다. 그렇지만 몇몇 파트리키 가문은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해 [[군인 황제 시대]]에 [[푸피에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등 일부 황제를 배출한다. 하지만, 군인 황제 시대가 끝날 무렵이 되면, 원로원의 위상 하락과 갈리에누스 대부터 떠오른 군인 귀족들의 연이은 집권과 발호 아래 종적을 감췄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고위 관직을 역임한 측근들에게 파트리키 칭호를 부여한 것을 시작으로, 파트리키는 고위 관료들에게 주어지는 명예 칭호가 되었다. 파트리키는 서로마 제국 말기에 드물게 사용되었고 높은 명성을 유지했으며,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등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들은 하나같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파트리키 칭호는 계속 사용되었다. 최고의 고위 직위를 보유한 자는 프로토파트리키오스(πρωτοπατρίκιος, "최초의 귀족")라는 칭호로 일컬어졌으며, 여성형으로 변형된 파트리키아(πατρικία)는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은 인물의 배우자를 나타냈다. 그러나 점차 마기스트로스(magistros), 안티파토스(anthypatos), 스트라테고스(strategos)에게 밀려 빈도가 줄어들다가 12세기 초 [[콤니노스 왕조]] 치세 동안 사라졌다. [[분류:고대 로마의 정치]][[분류:이탈리아의 귀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