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소리 (문단 편집) == 역사 ==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소리광대’ 라고 불렸는데 광대는 일명 화랑(花郞)·재인(才人)이라고 하여 중세기의 [[연예]]를 맡았던 우인(優人)이다. 그들은 소위 '사니' 계급에 속하는 일종의 [[천민]]이며, 호적에 우인(優人)이라 표기되었다. 이들은 대기 군아(郡衙)의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관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재인(才人)으로 봉사케 하고 군수가 [[나들이]] 할 때는 그들에게 궁중의 나례(儺禮)를 치르게 하였다. 또 명이나 청국의 [[사신]]이 오면 이들로 하여금 연출하게 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에 합격하고 내려온 신급제(新及第)의 3일유가(三日遊街)나 문희연(聞喜宴)에 악기를 연주하거나 소리를 부르며 전도(前導)를 하는 등, 조선사회에선 우인·창자(唱者)로서 연예문화에 봉사해온 것이다. 이 중에서 그들의 중요한 소임은 인조 이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희자(戱子)로서 가면극을 연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산대도감극은 대화와 창(唱)과 춤(舞)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스토리를 여러 사람이 협동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설명을 해가며 그 장면 장면을 노래와 대사로 엮어 갈 때 '배뱅이굿' 같은 형태의 그 무엇이 생성(生成)된다. 그 무엇이 바로 판소리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판소리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불리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조선창극사》에는 1930년대의 여러 명창들이 증언한 것을 토대로 하여, 판소리는 숙종 말에서 영조 초에 걸쳐 하한담(河漢潭)과 결성(結成)의 최선달(崔先達)에 의하여 시창(始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묘연하다. <목천읍지(木川邑誌)>에 우인의 이름으로 하한돌(河漢乭)이 <효행(孝行)편>에 나오고 결성에 해주최씨가 살고 있으나 그곳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우춘대(禹春大) 다음에 권삼득(權三得)이 나오는데 이 권삼득은 생원(生員)이라고도 하며 전북 완주군(完州郡) 안동 권씨(安東權氏) 향반(鄕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영조 47년(1771)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판소리문학에 내재된 그 문학성을 해명하는 데는 이런 향반 자제의 참가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창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판소리사(史)는 네 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첫째 시기는 시창기(始唱期)에서 영·정조대까지의 형성기, 둘째 시기는 고종 때까지의 전성기, 셋째 시기는 고종 말기 이후에서 근대까지의 쇠잔기, 넷째 시기는 현대의 발전기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