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판소리 (문단 편집) === 개화기 === [[신재효]]의 활약으로 현대 판소리와 유사한 방향의 판소리 형태가 정립되었다. 그는 전국을 돌면서 구전으로만 전래되던 판소리를 수집한 뒤, 자신의 사설적 지향점을 담아 글로 옮겨서 일종의 정본을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 시기의 명창은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또 '후기 8명창'으로 압축, 종합되곤 하는데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새소리를 냈더니 진짜 새들이 몰려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김세종[* [[신재효]]에게서 판소리 [[이론]]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송우룡[* 대다수 자료에는 전기 8명창 송광록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 송만갑 일가의 [[일제강점기]] 호적 자료를 보면 송흥록의 아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송흥록의 아들 중 하나가 송광록 집안의 [[양자]]로 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와전된 [[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춘풍[* 양반 출신 광대였다고 전한다. 그의 더늠이라는 '천봉만학가'나 '소상팔경' 등에 한자 사설이 많은게 그 때문이라고. 그 외에도 [[적벽가]] 가운데 공명 기풍(=동남풍) 장면에서 축문이 그가 짠 소릿제라고 한다(박동진 증언). 단, 공명의 축문은 김연수의 창본에서도 보이고, 김연수는 이 대목을 정정렬에게서 배웠다고 하므로 이 경우와는 다른 계열로 보인다.], 김창록, 장자백, 이창윤 등이 거론된다. 여기에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손꼽히는 진채선도 이 시기의 인물로 본다. [[개화기]] 때의 잘 알려진 판소리 애호가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