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달문 (문단 편집) == 개요 == 팔달문(八達門)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 (팔달로2가)에 소재한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1964년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402호로 지정됐다. 과거부터 팔달문 주변 교동이나 팔달로 일대를 '''남문'''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대중매체에서 팔달문이라 호칭하는 관계로 젊은 층은 보통 팔달문으로, 고연령대는 남문으로 자주 부르곤 하는 편.[* 비슷한 예로 [[수원화성]]을 그냥 '수원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역시 젊은 층에서는 수원 화성, 연령대가 높은 층에서는 수원성이라고 자주 부른다.] [[숭례문]]을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것 처럼 정식 명칭이 따로 있는 성문의 이름을 방향을 따 부르는건 상당히 흔한 일로, 이것이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조선)|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름은 수원 중앙에 위치한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방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정조 당시의 것을 1975년 복원 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팔달문 일제강점기.png|width=100%]]}}}|| 원래는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남서/동 적대가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수원화성 복원 당시 성곽을 연결 시키지 못한 몇 안 되는 지역. 성곽을 연결하여 완전 복원을 하려면 남문시장(팔달문시장) 일부를 부숴야 한다. 현재는 성곽, 남공심돈, 남암문, 남서/동 적대 복원을 위해 시장주민들과 협의중에 있다. 물론 반대하는 주민들도 있다. 2029년까지 성벽 복원예정이다. 서쪽의 팔달산을 통해 성곽이 연결되고 [[서장대]]와 [[화서문]]으로 갈 수 있다. 팔달문 2층 누상에는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팔달문 동종(八達門銅鐘)이 달려 있었다. 종걸이는 음통이 없는 용두 뿐이고 상대에는 내부에 글씨를 넣은 수십 개의 문양을 두 줄로 나란히 돌렸으며 종신에는 이 종을 주조한 장소와 연대 유래, 주조자들의 명문이 주자 혹은 각자되어 있다. 하대에는 보상당초화문을 양주하여 돌린 고려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의 형식을 하고 있다. 원래 만의사에 있던 종으로 1913년에 이곳으로 옮겼고 2009년에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박물관으로 옮겼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또한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 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그러나 팔달문 덕분에 주변이 너무나 개발이 잘되었는지 사람들이 팔달문 자체를 보러 여기로 오기보다는 대부분 이곳의 주변시설을 목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으며, 팔달문을 조금이라도 알고있더라고 그저 '''남문''' 이라는 뜻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팔달문이란 문화재 자체의 인기는 저조한 편이다. 그래도 가끔 대포 카메라로 팔달문을 찍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팔달문의 인기가 없는 게 당연한 것이, 팔달문 주변으로 가는 것조차 힘들고,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팔달문 부지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무단횡단을 해야 한다. 어찌 들어가더라도 팔달문 계단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간판이 떡하니 있다.] 사람들이 들어가거나, 직접 그 문을 이용하거나, 아예 휴식까지 취할 수도 있는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과는 대비된다.[* 심지어 [[화서문]]은 보물 403호이다.(...)] 또한 2019년 12월 기준 팔달문의 편액[* 문의 이름이 적힌 간판.]이 없는데, 편액의 재복원을 위해서 없애고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다시 걸기 위해 철거된 것이다. 2020년 5월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의 편액이 다시 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