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라우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오세아니아의 역사)] [[https://www.heritagedaily.com/2022/02/new-insights-into-the-construction-of-the-pyramids-of-pala/142820?amp|팔라우의 피라미드]] 16세기 중엽에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인 스페인령 동인도에 포함되었으나, [[미국-스페인 전쟁]] 후 [[독일 제국| 독일]]이 스페인에게서 구매하면서 19세기 [[독일 제국]]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 포함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당시 연합국이었던 일본이 접수하면서 [[일본 제국]]의 위임통치령인 [[남양군도]]의 일부가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일본 위임통치령인 [[남양군도]]였고, 팔라우에는 일본령 남양군도의 통치 중심지인 코로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계들이 꽤 많이 살았어서 1930년대엔 남양군도에서 [[미크로네시아인]]보다 [[일본인]]이 더욱 많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팔라우는 완전히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팔라우는 그 위치상 일본군이 필리핀이나 남태평양 방면에 전력을 투입하기 위한 중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수밖에 없었다. 1944년 들어 일본군이 여러 곳에서 연전연패하면서 일본군 점령지역이 축소되자 팔라우는 이제 중간기지가 아니라 일본군이 반드시 지켜야 할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1944년 3월에 미 해군기동함대는 팔라우를 본격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으며 이 와중에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코가 미네이치 대장도 팔라우에서 필리핀 다바오로 향하다가 실종되는등 난관을 겪었다. 그리고 1944년 9월에는 미 해병 1사단이 팔라우 펠렐리우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처절한 전투를 몇 달간 치러 역사에 그 유명한 '[[펠렐리우 전투]]'로 기록되었다. [[더 퍼시픽]]이나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등의 매체에서 묘사되는 펠렐리우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문에 팔라우에는 오늘날까지 일본 군함이 침몰한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나 파괴된 채 버려진 일본 전차 등도 전시된 곳이 있다. 이 때문에 팔라우어에는 '로무샤(노무자)'를 비롯하여 [[일본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들이 많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한 [[유엔|UN]] [[신탁통치]]령인 [[태평양 제도]]가 되었고, 현지인에 의한 의회가 설립되는 등 독립을 준비하였으며 마침내 [[1994년]]에 독립했다. 독립 후에도 국방은 미국에 위탁하고 있다. 독립 후에는 대통령이 둘이나 암살되는 등 정치 혼란이 극심하였으나 6대 대통령인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취임 이후 안정을 찾아갔다. 이 시기에 재정부채 대부분을 해결하고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이 두 배 가량 증가하였으며 관광산업 육성을 시작했다.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은 일본계였지만 [[페루]] 출생의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달리 한국이나 일본에선 워낙에 작은 [[섬나라]] 대통령이라 그런지 묻혔다. [[1990년대]]에 나카무라 대통령이 한국에까지 왔음에도 당시 [[신문]]에선 정말 작게 보도했을 뿐이다. [[OBS]]의 아시아의 아침식탁이란 프로그램에서 팔라우로 취재를 가서 동네 학생에게 볼거리 추천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 학생은 '''산 위에 사는 사람'''이 아는 것이 많다고 하며 그를 찾아가보라 하였는데, 제작진이 찾아간 주택에서 열대꽃 무늬 옷을 입고 나타난 친근한 인상의 아저씨의 정체는 바로 '''팔라우 [[대통령]]'''. 황공해하는 제작진 앞에서 그는 자신의 전용 [[작살]]을 보여주고 [[정글]]과 바다 [[스쿠버다이빙]]을 추천해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