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스타인/역사 (문단 편집) == 중동 전쟁 == * 자세한 내용은 [[중동전쟁]],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참고. * ☞:[[http://newspeppermint.com/2014/07/14/israel_palestine-1/|(Vox)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파일:external/fasttimesinpalestine.files.wordpress.com/four-panel-map.jpg|width=600]] 팔레스타인 지역 변천사 과정(우리가 흔히 팔레스타인의 영토변화라고 알고있는 사진)[* 사실 해당 지도 맨 왼쪽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당시 유대인의 거주구를 의미하며, 왼쪽에서 두번째는 분할안에 불과했지, 실제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토가 저런적은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서안지구를 차지하던 요르단과 가자지구를 차지하던 이집트의 영토를 팔레스타인의 영토라고 표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오슬로 협정|현재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국의 영토는 맨 오른쪽이 유일하다 해도 무방하다.]] ][* 해당 지도의 출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발표한 영토사진이며, 이집트와 요르단의 땅이었던 곳을 자신들의 영토로 표기했다.][* 이 지도들이 나름 유명한 이유는 국제연합에서 인정하는 영토이기 때문이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지도는 사회과부도 등에 자주 소개되었다. ] [[파일:팔레스타인역사.png]]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 및 건국을 선언하였으며 이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발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며 유혈사태로 치닫는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난 대량 난민 사태를 [[팔레스타인]]에서는 [[나크바]]라고 한다]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으로 나뉘었고,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구]]는 [[요르단]]에, [[가자 지구]]는 [[이집트]]에, [[골란고원]]은 [[시리아]]에 각각 귀속되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면적의 78%를 차지하며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 중 상당수는 졸지에 [[난민]]이 되어 [[가자 지구]]나 [[서안 지구]]로 떠돌아 다니거나 주변 이슬람 국가로 망명하게 된다.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친소 노선을 걸으며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제국주의 시절의 찬란한 영광을 잃기 싫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나세르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으면, 나세르가 서방을 우습게 알고 폭주할 것이라 여겨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집트에게 큰 위협을 느끼던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되면서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소련]]과 [[미국]]의 압박으로 결국 [[시나이 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복수하기 위해 수시로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도발하거나 압박했고 결국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전투기 300대를 모두 폭파시켰고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에서 근접한 [[이라크]]의 공군 기지들을 폭파하였다. 그 결과 아랍 연합군은 1만8천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5600명이 전쟁 포로가 되었고 세 나라 연합군 장비의 70%가 파괴되었다.(이스라엘군 776명 사망, 2600명 부상) 그 결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1982년 이집트에 반환한다], [[가자 지구]], [[서안 지구]], [[골란 고원]]을 얻었는데 이는 유엔에서 인정한 이스라엘의 영토의 3배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이것이 [[제3차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후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가 2005년에 가자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서안 지구에 대해서는 유대인 정착촌을 넓히고 [[2008년]] 12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1차 [[가자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등 공격을 꾸준히 감행하였다. 사실 여러번 평화가 성립될 뻔도 했다. [[1987년]] 12월 최대의 난민 캠프인 자발리아에서 인티파다(대중 봉기)가 발생하였으며, [[1993년]] 8월 결국 제11차 중동 평화 협상([[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포함한 점령지역의 자치안에 서명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협정이 늦어진 것은 오랫동안 [[야세르 아라파트]]가 난민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팔레스타인에서 자의타의로 쫓겨난 이들이 돌아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난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http://ttalgi21.khan.kr/446|#]] 난민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 이유는 (해외 유대인의 귀화는 얼마든지 찬성하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을 수백 번 찜쪄먹을 규모의 아랍권조차도 이들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크다. 이후로는 더 시궁창이다. [[아리엘 샤론]](01~06 총리)는 양반일 정도의 강경한 [[시오니즘]] 정파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전쟁영웅 라빈(92~95 총리)도 아라파트와 손을 잡고 오슬로 협정을 채결했다는 이유로([[1994년]] 노벨평화상 수상) 이스라엘 극우파에게 암살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짧은 평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했다. 그 후에도 간간히 온건파인 노동당이 집권하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온건파의 대부격인 시몬 페레스 현직 대통령(2007년 7월 취임)의 "온건함"이라는건 [[터키]], [[이집트]], [[요르단]]과 친분을 유지하고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정도다. 가자지구 폭격과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온건파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동당 당수에서 샤론의 카디마당으로 갈아탄 것도 있지만, 정작 카디마당은 [[2005년]] 말 여당이었던 리쿠드 당이 가자지구 철수에도 반대해서 샤론이나 올메르트 등이 분당한 상대적 온건파라는 것이 [[충공깽]]. 그런데 그 강경한 리쿠드 당이 다시 노동당 잔당(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99~01)과 손을 잡고 연정을 개시했다가, 도로 2012년에는 총선승리를 위해 다시한번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극우파와 손을 잡았다. 샤론 역시 [[2000년]]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를 "평화"를 내세우며 방문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 '알박기'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을 하다가 총선에서 부진하며(11석 감소) 제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좌우 의석이 똑같은지라 더 이상 강경해지기는 힘들 듯. 특히 50세의 언론인 출신 야이르 라피드가 이끄는 중도 좌파 성향 ‘예쉬 아티드(이스라엘의 미래)’당이 전체 120석 중 19석을 얻어 2당이 되었다. 2012년 4월 창당 된 이 신생 정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2개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정통파 유대교의 병역 특례, 팔레스타인 차별에 반대하는 정당이다. 물론 [[하레디]]에 대한 병역 특례는 극우 정당들도 더이상 찬성하지 않고 폐지에 의견을 모은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역시 2006년 1월 총선에서 과격파인 하마스가 132석 중 74석을 차지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