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스타인/역사 (문단 편집) == 로마 ~ 아랍 이슬람 시대 ==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정복하여 시리아를 제국의 속주로 포함시키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맹국이 되기로 한다. 로마의 방위 전략이 속주(식민지)화하는 것보다 동맹국으로 남겨서 전시에 병력 지원을 받는 쪽을 선호했고, 동맹국인 이상 내정간섭은 자제했다. 왜냐하면 속주의 방위비가 속주에서 거둬지는 세금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로마 제정기의 세금의 대부분은 이러한 방위비에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속주화는 지양되었고, 소키(동맹국)으로 삼는 편이 필요할 때 병력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유리했다. 동맹국이 로마나 다른 동맹국을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내부 정치 형태가 뭐가 되었던 신경쓰지는 않았다. 물론 동맹국의 자체적인 세금 징수에도 관심없었고 당연히 로마가 세금을 걷지도 않았다. 이러한 근거로 [[헤로데 대왕]]이 사후에 로마에게 [[유대]]의 권리를 이양했을 때도 후계자를 키워서 왕국을 부활시킨 점에서 드러난다. 로마의 속주세는 언제나 일정 빈도를 유지했으며 로마의 다른 속주들에서는 반란이 매우 드물었다. 부활한 헤로데 왕조도 1세기 말에 왕조가 단절되어 또다시 로마의 속주로 남게 된다. 새로운 왕정도 단절되며 로마에 할양한다.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속주세율 따위가 아니라 신정정치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로마의 속주 및 이민족 지배 원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는 당연한 군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도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가지겠다는 요구도 들어주었다. 심지어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도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거부하는 것까지 봐줬다. 그런데 세금 납부마저 거부하고 독립 신정국가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었다. 반란의 원인이 된 것은 당시 로마의 황제의 신성성에 있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이고, 그런 만큼 엄청난 수의 신이 있었고, 죽은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그다지 대수로울 게 없는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황제의 아들(양자)는 황제의 공식 직함 중의 하나였다. 당시 로마의 모든 황제는 사후에 신으로 추존되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이 된다. 새 황제의 첫번째 임무가 선대 황제를 신으로 추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은 자신들의 유일신 이외의 신을 인정할 수 없다며 황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헤로데 대왕의 로마 양위 이후 [[유대]] 지방은 [[디아스포라]]가 발표된 300여 년간 계속 반란을 거듭했다. 그 때문에 로마군은 유대 속주에 1개 군단을 상주시켜야 했다. 로마가 유대왕국을 부활시키려고 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이런 경제적, 군사적 부담 때문이었다. 당시 유대 지역보다 몇 배나 크고 더 많은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이집트에도 고작 1개 군단이 상주했으며, 이베리아 반도 역시 크기로는 몇 배지만 1개 군단 상주가 고작이었다.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에도 1개 군단만 상주했다. 유대 지방 하나에 이집트와 맞먹는 정도의 군사비를 쏟아부어야 했다는 뜻이다. ~~돈 먹는 하마~~ 그렇다고 유대 땅을 완전히 포기하기엔 로마 입장에선 너무나 아까운 땅이었다. 고대로부터 동방과의 가장 중요한 무역-군사적 거점인 시리아 지역과 로마 최고의 곡창 지대인 이집트 지역을 육로로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 바로 유대 지방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 이후로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이 차례로 이 지역을 점령한 것도 이같은 무역로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유대 지방을 포기한다는 건 이 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연계가 끊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로마 입장에선 차마 깨끗히 포기할 수 없었다. 로마 5현제 중의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디아스포라]]를 명한 이유는 지긋지긋한 반란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면, 반란의 온상이 되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고,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만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만 아니라면 유대 지방 어디에서 살든 상관없었고, 그것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도 같았다. 또한 유대교만 안 믿으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디아스포라 이전부터 동방의 대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40% 정도가 유대인일 정도로 유대인의 이사는 자발적이었으며, 이는 디아스포라 이후에도 같았다. 또한 유대인의 특수성에 대한 로마의 용인도 계속되었다. 징집을 거부하든 유대교를 믿든, 그렇기 때문에 토요일마다 일을 안 하든 간에 세금만 제때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132년부터 135년까지 유대 민족의 바르 코크바 반란이 실패한 후,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일부는 유대 땅 밖으로 쫓겨났다. 로마 제국은 고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이민족 필리스티아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의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32년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고 로마신화의 최고신 유피테르를 위한 신전들을 지었다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일부로서 통치받았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 지역도 기독교를 믿게 된다. 352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동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당한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이 [[정통 칼리파 시대|이슬람 세력]]에게 패하고 이 지역은 정통 [[칼리파]]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대 이후 현지 주민들은 서서히 아랍어를 사용하여 아랍인으로 동화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공통 성지가 되었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을 건설한 후, 십자군 국가는 200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1291년 [[맘루크 왕조]]에게 제9차 십자군이 패하면서 십자군 국가는 소멸하고 맘루크 왕조의 통치 하에 놓인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증오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이 허약해진 틈을 타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는데, 이집트 역시 오스만과 다를 게 없었다. 나중에 이집트가 오스만한테 패하고 다시 오스만의 식민지가 되었을 땐 더 심한 착취를 당했다. 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