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진도 (문단 편집) === 연원 ===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팔진도가 제갈량이 창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진]](西晉)의 이흥(李興)은 제제갈승상문(祭諸葛丞相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진도는 손오(孫吳)의 병법에도 없는 것이다. 즉 유명한 [[손무]](孫武)와 [[오기(전국시대)|오기]](吳起)의 병법에도 팔진도가 없으므로,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여러 가지 사료를 검토해보면, 팔진도의 역사적 자취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평 원년(永平 元年) 89년 [[두헌]](竇憲)이 [[흉노]]를 정벌하고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돌에 그 공적을 새겨놓았다. 또 [[반고]](班固)의 연연산명(燕然山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레 1만 3천여 대가 구름처럼 도로를 뒤덮고 팔진을 구축했다. 그 위용이 마치 신군(神軍)과 같았으며, 검은 갑옷이 햇빛에 빛나고, 붉은 깃발은 하늘을 촘촘히 가렸다.(雲輜蔽路, 萬有三千餘乘, 勒以八陣. 莅以威神, 玄甲耀日, 朱旗縫天) 또 이현(李賢)[* [[명나라]]의 대신]은 병법에 팔진도가 있다고 하면서 "두헌이 팔진으로 흉노를 격파한 것으로 미루어 팔진도는 고대 병법에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이 팔진도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병법을 참고로 자신이 실정에 맞게 개조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현의 판단이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갈량이 팔진도를 만들면서 참고로 삼았던 고대의 병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을 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두헌도 팔진도의 창시자는 아니다. 《[[정사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은 진의 제도를 대부분 이어받았다.(중략) 10월에 전차와 기마부대를 시험하기 위해 장수의 남문으로 행차하여, 5영의 군사들을 모아 팔진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시찰했다. 그렇다면 팔진은 진대에 이미 유행을 했으며, 한대에는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그 용도는 방진(方陣)으로 배열하여 검열을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1972년 [[산둥성]]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손빈병법]](孫臏兵法)》에는, 비록 글자가 마모되어 불완전하지만 200여자로 된 《팔진편(八陣篇)》이 있다. 이 자료는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우선 팔진도가 [[전국시대]]에 이미 출현했으며, 진수가 말했듯이 팔진도는 제갈량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대의 병법을 보고 나름대로 수정보완을 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또 이흥이 팔진도가 당시에 유행했던 손무와 오기의 병법에는 없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팔진이 실제로 응용된 《[[손빈병법]]》의 《팔진편》은 다음과 같다. >팔진을 전쟁에 활용하려면 지형을 이용하여 거기에 적합한 8가지의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즉,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8가지의 진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거기에 적합한 군사를 배치하야 적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뜻이다. 작전의 도구를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지형이 평탄하면 전차를 투입하고, 험하면 기병을 투입하며, 협소한 곳에서는 노궁수를 투입한다.(易則多其車, 險則多其騎, 厄則多其弩)"라고 하였다. 《[[회남자]] 병략편(淮南子 兵略訓)》에는 "평탄한 곳에서는 전차를 투입하고, 험한 곳에서는 기병을 투입한다.(易則用車, 險則用騎)" 하였으므로, '액(厄)'은 곧 협소하고 막힌 지형을 가리킨다. 《[[좌전]] 소공 원년(左傳 昭公 元年)》에는 "적은 보병이고 아군은 전차일 때, 서로 협소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 전차를 이용하여 가로 막아야 승리를 할 수가 있다.(彼徒我車, 所遇又厄, 以什供車, 必克)" 하였다. 춘추시대에 전쟁을 할 때는 [[전차]]를 많이 이용했다. 그러므로 협소한 지형에서 적의 보병과 갑자기 마주치면 전차를 연이어 공격하여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전차가 이미 기병으로 대체되었으므로, [[손빈]](孫臏)이 말한 '易則多其車'에서 '거(車)'는 이미 과거의 전투에서 활용했던 전차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손빈이 말한 전차는 전투용이 아니라 군수품을 싣고 운반하는 치중거(輜重車)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 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지에서 팔진도를 포진하는 것은, 갑자기 적이 기습공격을 했을 때 아군을 엄호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말한 두헌이 흉노를 공격했을 때 팔진을 짠 것은 치중거(輜重車) 1만 3천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터가 끝없이 넓은 [[사막]]이었므로, 치중거를 이용하여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흉노의 기병이 돌진을 하면, 한의 궁노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퍼붓거나 긴 창과 예리한 칼로 방어진을 뚫고 들어온 적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 다음 전황이 변화하는 대로 진형을 변화시켜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한말이 되면 팔진도는 군사검열에 활용된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팔진도를 내놓기까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의 진법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식도 변하고, 또 유력한 전투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갈량이 오늘날까지 팔진도의 창시자로서 여겨지는 것은 이런 팔진도의 기능을 되살렸기 때문으로 제갈량 이후 지금까지 팔진도는 제갈량 고유의 전술로 인식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