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퍼니전차 (문단 편집) == 개발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funnytank1.jpg|width=100%]]}}} || || 영국 육군 소장 '''퍼시 클레그혼 S. 호바트 경''' [br] (Major General Sir. Percy Cleghorn Stanley Hobart, KBE, CB, DSO, MC) || 퍼니전차 개발에 앞장선 호바트 소장은 영국군 내의 전차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리델 하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의 전차 개발은 기존처럼 전선돌파용의 [[육상전함]] 포지션을 이어가야 한다는 다수의 보수파와, 전차를 기동전 위주의 과거 기병 역할과 같은 관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소수의 진보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는데, 호바트는 이 가운데 후자에 속했고, 여기에 더 나아가서 [[전차 만능주의|전차 만능론]]의 신봉자였다. 이 때문에 영국군 안에서도 적이 많았다. 퍼니전차가 워낙 임팩트가 강하여 호바트 소장을 '''그냥 괴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영국 기갑부대를 키워낸 관리자로서의 능력과 공헌이 훨씬 컸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보병과는 독자적인 기갑 부대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그 아래의 간부와 병력을 훈련시키는 기획자 및 관리자로로서의 능력이 뛰어났고, 실제 그의 공훈은 여기에서 나온다. 퍼니전차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능력도 없이 무언가를 해보자고 하면 그걸 실행해줄 군부나 정부가 있을지부터 생각해면 쉽다. 즉 능력이 되니까 상부에서도 해볼까? 해서 만들어진 게 퍼니전차지, 그냥 이상한 괴짜가 만들자고 했다가 운좋게 만들어진 전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군 기갑 선구자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는 인물답게 1934년에는 영국군에 최초로 편성된 기갑여단장에 취임했고, 1937년에 참모차장을 거쳐 다음해에는 이집트에 창설할 기갑사단의 최초 사령관이 되어 앞으로 만들어질 사단의 편제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보수적인 윗선의 시각에서는 전차만능주의로까지 보일 수 있는 그의 진보적인 사고는 전차를 비롯한 기갑 전력을 보병의 보조 역할로만 인식하던 영국군의 [[높으신 분들]]과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적이 많았기에 당연히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언론플레이는 물론 시중에 전차의 집중운용은 물론 차량화-기계화 보병과의 연계, 전 차량의 무전기 설치의 효용성 등을 담은 책도 발간했는데, 영국 사회에 외면을 받았던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독일 기갑부대를 창설 중이던 구데리안 등의 독일 기갑병과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그가 편성한 부대는 초기에는 부실한 장비 구성으로 인하여 군 내부에서도 '이동 극단(Mobile Farce)'으로 불릴 정도로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집트에 뿌린 씨앗은 그 이후에 벌어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제대로 이름값을 했는데, 그가 만든 부대가 바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이름을 날린 영국군 제7기갑사단, 일명 '''사막의 들쥐들(Desert Rats)'''이었기 때문. 하지만 보수적인 보병 중심의 전차관을 버리지 못한 군 상층부에서는 호바트를 미워했고, 전차전이라는 새로운 전쟁 양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당시 그의 상관인 [[아치볼드 웨이벌]]은 반 호바트파가 던져주는 악평까지 그대로 받아들여 호바트의 목을 날리고 강제 퇴역시켰다. 참고로 호바트를 퇴역시킨 웨이벌은 이탈리아군 상대로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등장하면서 독일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배틀액스 작전]]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해임되었다. 그리고 롬멜을 아프리카에서 몰아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버나드 로 몽고메리|호바트의 매부]]였다.[* 참고로 몽고메리의 부인은 베티(엘리자베스의 애칭) 카버인데, 그녀의 원래 이름은 엘리자베스 호바트다. 몽고메리와 결혼할 당시에 이미 애 딸린 미망인이었기에 전 남편의 성을 쓰고 있어 성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퇴역까지 당한 호바트와 달리 이미 충분히 높으신 분이었던 웨이벌은 인도 주둔군 사령관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인도 총독까지 오르며 [[사내 정치|군내 정치]]의 승자가 되고 [[백작]] 작위까지 받는다. 그렇게 퇴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호바트는 독일군의 영국 상륙에 대비해서 결성된 지역 [[홈가드]](Home Guard : 향토 방위대)에 가입했는데, 여기서도 그의 조직 구성 능력은 빛을 발했다. 홈가드는 지원은 부실하고 반대로 대원들의 열의만 높아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았는데, 호바트는 이런 [[당나라 군대]] 수준의 홈가드를 재편성하여 지역의 방위 능력을 눈에 띄게 향상시켰고, 곧 그 공적을 평가받아 지역 홈가드 부사령관까지 오르게 된다. 마침 그의 멘토이기도 한 리델 하트가 신문 투고 형식으로 호바트의 강제 전역을 비판하기도 했고, 홈가드에서 쌓은 공적도 인정을 받아 [[윈스턴 처칠]]은 그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제11기갑사단, 일명 'Charging Bull'의 편성과 훈련을 맡겼다. 여기서도 그의 기갑 부대를 키우는 남자로서의 능력은 빛을 발해 호바트가 편성한 11기갑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주노 해안에 상륙한 뒤 독일을 향해 진격하여 종전까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물론 이 결정에 호바트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그놈은 늙어서 안 돼', '그놈은 병들어서 안 돼'라는 별의 별 이유를 들어 그를 끌어 내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처칠이라는 강력한 실드가 반대파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이렇게 11기갑사단의 기초를 쌓은 뒤 새로 편성을 시작한 것이 [[제79기갑사단]]이었다. 영국군은 [[디에프 상륙작전]]에서 겪은 망신을 교훈삼아 기존의 방법으로는 해안에 요새화가 이뤄져 단단히 구축된 방어선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고, 앞으로 벌어질 본격적인 상륙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이러한 삽질이 벌어지지 않도록 상륙전에 특화된 기갑 장비 개발을 검토했는데, 그 역할이 제79기갑사단에 떨어졌다. 79기갑사단은 초기에는 윗선에서의 지원 부족으로 부대 해체 위기까지 겪었지만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앨런 브룩이 후원자로 나서 특수 기갑 부대로 전환하여 위기를 넘기며 본격적으로 부대의 모습을 갖춘 뒤 호바트 이하의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후에 호바트의 괴짜로 불리는 특수 전차의 개발과 배치, 운영을 시작했다. 이러한 특수 전차의 개발은 호바트의 매부이기도 한 버나드 몽고메리를 통해 미군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당시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도 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미군은 '''겉모습만 보고''' DD 셔먼만 채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