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펑궈장 (문단 편집) === [[신해혁명]]에서 [[호국전쟁]]까지 === 1911년 8월 추계군사훈련을 주관하였으며 동로 총통관에 임명되었다. 1911년 10월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호북성 창덕에서 기회를 엿보며 청조에 위안스카이를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하였고 위안스카이가 흠차대신에 임명되면서 10월 27일 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혁명군 토벌에 나섰고 펑궈장은 [[우한]] 공격에 참가했다. 11월 27일, 북양군이 우한삼진 중 한커우와 한양을 점령하자 펑궈장은 기세를 몰아 우창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위안스카이는 1군 사령관을 돤치루이로 교체하고 펑궈장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집권을 도모했다. 군부에서 유력한 군주제 옹호자였던 까닭에 펑궈장은 금위군 총통 겸 차하얼 도통에 임명되었고 선통제의 퇴위가 목전에 다가오자 군주제 지지자들이 종사당을 조직하고 펑궈장에게 지지를 요청했으나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펑궈장은 청실을 옹호하는 금위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자 금위군에 대한 우대조건을 약속하며 금위군이 위안스카이에게 복종하게 하는 등 위안스카이의 쿠데타를 적극 조력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총통부군사처처장, 직예도독 겸 민정장관에 임명되었고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정계가 시끄러워지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 소속인 안휘도독 백문울, 강서도독 [[리례쥔]] 등을 매국노라 비난하여 3독 해직 사건에 기여했다. 1913년 [[계축전쟁]]에서 강회선무사 겸 북양군 2군군장에 임명되어 혁명군을 진압했고 이 공으로 12월 16일, 강소도독에 임명되어 이후 난징에 주둔하며 남방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이후 육군상장으로 승진하여 선무상장의 칭호를 받았으나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신뢰하지 않아 심복 왕자명, 4사단장 양선덕, 10사단장 [[루융샹]]을 파견하여 펑궈장을 견제, 감시하게 했다. 이를 눈치챈 펑궈장은 더 이상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를 멀리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5월에 신약법을 발표하여 황제를 꿈꾸었는데 펑궈장이나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면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구실이 없어지므로 제제에 반대했다. 1915년 6월, 펑궈장은 [[량치차오]]의 요청에 따라 베이징으로 올라와 위안스카이에게 제제의 의사가 있는지를 묻었는데 위안스카이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1915년 12월, 끝끝내 [[홍헌제제]]를 단행하였다. 제제 이후 펑궈장은 12월 21일 1등 공작 겸 육군 참모총장에 책봉되었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에게 베이징으로 와서 취임하라고 했으나 펑궈장은 병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후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가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초기에는 토벌을 통전했으나 호국군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거세지자 수수방관하였고 오히려 절강성의 혁명군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 [[장쉰]] 등과 함께 오장군통전을 통해 제제 취소를 요구했고 4월 16일 위안스카이에게 퇴위를 권고하는 전보를 보냈다. 굴복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4월에 돤치루이를 국무경으로 삼아 대총통 자리라도 보전하려 했지만 돤치루이는 노골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며 권력을 엿보았다. 위안스카이는 마지못해 4월 21일 정부조직령을 발표, 5월 8일 정부조직법을 수정공포하여 정사당을 폐지하고 돤치루이에게 국무총리 자리를 주어 내각을 조직하게 했지만 돤치루이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이때 펑궈장은 장쉰, 제요림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유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이용해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해 펑궈장을 이용하려 했지만 펑궈장 역시 위안스카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위안스카이의 요청에 따라 난징회의를 열어 제제 취소 이후의 대책을 논한다는 구실로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직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인정받으려 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3세력을 조성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허나 산동성을 시작으로 각성 대표들이 위안스카이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면서 회의는 소득 없이 종결되었다. 펑궈장은 오히려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시국수습의 명분으로 대총통이 되려고 시도했다는 비난을 받아 인망을 잃었다. 결국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요독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펑궈장은 돤치루이와 함께 위안스카이의 후계자 자리를 넘볼만한 인물이었으나 평소에 재물욕이 많아 검소한 돤치루이에 비해 인망이 부족했고 신해혁명 시에 남방의 혁명세력에 대한 강경론을 고수했기 때문에 남방이 그를 싫어하여 일단 후계자 승계에는 실패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대총통이 되어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은 종결되었다. 8월 1일 국회가 복구된 이후 펑궈장은 10월 30일 부총통에 선출되었는데 자신의 기반인 강서성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11월 8일, 난징에서 부총통에 취임, 강소도독부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후 난징에 부총통 판사기구를 설립하고 사실상 강남의 대총통으로 행사하며 외국 기자들을 접견하며 위세를 부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