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궈장 (문단 편집) === [[부원지쟁]]에서 [[호법전쟁]]까지 === 이후 중화민국은 대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 사이의 정쟁인 부원지쟁으로 시끄러워졌다. 펑궈장은 돤치루이를 견제하려는 리위안훙과 연계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직계군벌]]과 [[안휘군벌]]의 분열이 심각하지 않은 상태라서 돤치루이와도 가까웠고 1917년 3월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해버렸을때 돤치루이를 설득하여 복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내각에 친일파 [[조여림]]이 포함되어있다는 이유로 불만을 드러냈으며 1917년 3월의 조정 이후 강서독군 [[리춘]], 호북독군 [[왕잔위안]]과 반환동맹의 결성에 대해 논의했다. 돤치루이 탄핵 이후 리위안훙 지지를 천명하며 [[왕스전]]에게 내각을 구성할 것을 권했으나 왕스전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부원지쟁의 폭발이 [[장훈복벽]]이라는 엉뚱한 사건으로 번지자 선통제에게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쉰의 무력 때문에 강제로 끌려다니던 리위안훙이 대총통직을 펑궈장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하면서 중화민국 3대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펑궈장은 여러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복벽 반대를 통전하고 장훈복벽을 토벌했다. 하지만 선통제를 처벌하자는 남방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명했다.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고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장쉰이 해산한 국회 복구를 거부했다. 강소를 중심으로 장강 하류 지역에 기반을 구축했던 펑궈장은 자신이 베이징으로 갔다가 오히려 정치적인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장강 삼독 임명권이 있는지 확인 받은 후에야 8월에 베이징으로 올라와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했고 강소도독에 [[리춘]], 강서독군에 진광원, 호북독군에 왕잔위안을 임명하여 환계와 대립했다. 이에 돤치루이도 호남독군에 [[푸량쭤]], 장강상류경비사령 겸 사천사판사에 [[우광신]]을 임명하며 맞섰다. 한편 돤치루이의 독재에 반발한 [[쑨원]]이 광저우로 이동,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고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강행하면서 [[호법전쟁]]이 벌어졌다. 펑궈장은 전화가 자신의 기반인 강소성에 번질 것을 염려하였으며 호법전쟁을 진압하면 돤치루이의 위세가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서남군벌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화의를 주도하였고 11월에 정전령을 내리기도 했다. 호법군이 호남과 사천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1917년 12월 국무총리 돤치루이도 하야해야 했지만 [[쉬수정]]의 사주로 [[장회지]], [[차오쿤]], [[니쓰충]] 등 주전파 독군들이 1차 톈진회의를 열고 남방을 토벌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기 때문에 1917년 12월 18일 돤치루이를 참전독판에 임명해야 했고 1918년 2월, 남방과 휴전에 동의하였으나 1918년 3월 [[옌시산]] 등 여러 독군들이 연명으로 남방 토벌을 요구하여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 복직시키고 다시 토벌령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북양군벌]] 내부의 분열도 심각하고 서남군벌들도 자신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쑨원을 축출한 이후 화의를 바라는 통에 결국 호법전쟁은 흐지부지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