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궈장 (문단 편집) === 임기 만료와 말년 === 1918년 8월 12일, 안복국회라고도 하는 신국회가 개막했다. 참의원 139명, 중의원 339명으로 구성된 안복국회는 왕집당을 중의원 의장으로, 유은격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는데 이들은 모두 돤치루이를 지지하는 안복계였다. 중의원 의장엔 교통계인 [[량스이]]가, 부의장엔 주계검이 당선되었는데 모두 사퇴하면서 안복계가 중의원 의장과 부의장 자리도 차지했다. 국회는 안복계가 330명, 교통계가 50명, 연구가 20명으로 돤치루이의 우세가 절대적이었다. [[대총통선거법]]에 따르면 10월 10일에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게 되는데 직예독군 차오쿤과 장강 삼독은 펑궈장의 연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펑궈장은 안복국회에서 돤치루이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연임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연임하지 않으면 돤치루이가 총통이 되어 내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돤치루이 쪽에서 직예파와 안휘파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인물인 [[쉬스창]]을 추천하며 만약 쉬스창 당선에 동의한다면 펑궈장에게 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안했고 만약 펑궈장이 부총통까지 양보한다면 자신이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펑궈장이 동의함에 따라 펑궈장은 8월 13일, 대총통 불출마를 선언했으며 9월 4일 쉬스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함에 따라 펑궈장은 총통에서 퇴임했다. 이후 돤치루이는 약속대로 내무총장 [[첸넝쉰]]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내려왔지만 여전히 참전독판자리를 차지하여 [[안휘군벌]]이 중앙정부의 실세였다. 10월 23일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등 명사들이 평화기성회를 조직하여 내전의 중지를 호소하자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여 11월에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펑궈장은 환계의 득세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낙향했으나 쉬스창은 펑궈장을 달래기 위해 펑궈장에게 15사단과 16사단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렸고 고향인 한간으로 낙향해버렸던 펑궈장은 1919년 10월에 다시 베이징으로 북상했으나 상경한지 얼마 안된 1919년 12월 12일 병사하면서 직계군벌의 수령은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승계했다. 이후 직계군벌은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동맹하여 1920년 7월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을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