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린 (문단 편집) === 장쭤린에게 복종하다 === 헌데 갑자기 펑더린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들었다. 다름아닌 장쭤린이었다. 장쭤린은 27사단, 28사단, 29사단, 각 여단, 각 부대의 명의로 펑더린 석방 타원서를 올리며 적극적으로 펑더린 구명운동에 들어갔다. 이는 당연히 장쭤린이 녹림의 의리에 도취되어서가 아니라 28사단을 흡수하기 위한 정치적 쇼를 벌이는 것이었다. 이어 요서 지역 16개 현의 유지들도 동참하여 펑더린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장쭤린의 의사를 눈치 챈 돤치루이는 10월 15일 펑더린이 복벽운동에 동조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석방하고 오로지 아편 흡연 죄목으로 벌금 800원을 내게 했다. 펑더린은 계급과 훈장을 돌려받고 산릉수호대신으로 임명하여 [[백두산]]에 있는 누르하치, 홍타이지 등의 영묘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권력은 없어도 명예와 재물복이 많은 자리였기 때문에 펑더린은 장쭤린에게 크게 고마워하면서 봉천에 부임했다. 장쭤린은 자기 자신이 28사단장을 겸하였으며 곧 부하 급금순을 28사단장에 삼으면서 봉천성의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봉천부도통, 금주도통 등 의미없는 자리를 역임하며 펑더린은 조용히 잘 살았는데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봉군이 패하면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장쭤린을 몰아내려고 했던 [[직예군벌]]이 펑더린을 흑룡강성 독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장쭤린을 해하려는 음모임을 안 펑더린은 5월 15일 전보를 보내 임명을 거부했다. 이렇게 충성심을 입증한 펑더린은 조용히 살다가 1924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금주에 머물다가 1926년 8월에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