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펑위샹 (문단 편집) === [[장제스의 북벌]] === ||[[파일:attachment/uploadfile/warofpresident.jpg]]|| || [[장제스]](가운데), [[옌시산]](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 직봉풍전쟁 발발 직전인 1926년 4월, 펑위샹은 [[장쭤린]]을 이기려면 국민당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과 합작해야 한다고 느끼고 그해 5월에 [[스탈린]]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펑위샹은 모스크바에 3개월이나 머물면서 중국 유학생들과 [[차이허썬]], 류보젠을 비롯한 공산당원들과 만났고 소련인들과도 회동했다. 펑위샹이 소련에 있을 동안 펑위샹의 군대는 5월 18일, 옌시산을 공격했고, 이에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펑위샹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맞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우페이푸는 박살이 났지만, 펑위샹의 군세는 우페이푸와 장쭝창의 연합 공세에 패배하여 쑤이위안과 만리장성 일대의 영토를 잃고 간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민당의 1차 북벌|국민당이 북벌을 선포하고 북양군벌들에게 칼을 돌리자]] 펑위샹은 민족주의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국민당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패전을 수습하기 위해 1926년 8월 15일 류보젠과 소련 고문 유마노프 등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귀국하였고, 9월 17일 우위안 서약을 통해 국민당에 합세할 것을 선언했다.[* 이 자리에 [[덩샤오핑]]도 배석했단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시 덩샤오핑은 소련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잘못된 설명이다. 덩샤오핑은 1926년 말에 펑위샹의 공산당원 파견 요구에 따라 선발대로 결정되어 1927년 [[울란바토르]]를 거쳐 3월에 [[시안시]]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펑위샹 휘하에서 정치부 교관으로 근무했다.] 펑위샹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으로 선포하고 전군을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한편 펑위샹을 터는데 열중하던 우페이푸는 소련 교관들이 조련한 장제스의 정예부대들의 공격에 당해내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페이푸는 9월에 자신의 수도인 우한 3진을 장제스에게 내줘야 했고 우페이푸의 동맹인 쑨촨팡도 장시에서 쫓겨났다. 우페이푸는 허난으로 도주했고 쑨촨팡도 상하이 등을 내주고 달아났다. 우페이푸가 완전히 몰락하고 옌시산이 국민혁명군의 북진에 놀라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장쭤린이 펑위샹을 공격하기 위해 결성한 삼각동맹은 붕괴되었다. 그런데 펑위샹이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 국민당이 두 개로 쪼개졌다. 펑위샹은 우한과 난징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일단 펑위샹은 동진을 시작, 시안에서 출병하여 [[뤄양]]을 함락시키고 6월에 국민혁명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연합, 우한 군대와 장쭤린의 봉천군이 싸우는 동안 손쉽게 정저우를 함락시켰고, 1927년 6월 10일 정저우에서 왕징웨이와 회담했다. 펑위샹은 정저우까지 전용 열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에 일반 병사들의 군복을 입고 군용 트럭 뒷칸에 타고 빵을 씹으며 나타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펑위샹은 허난 성의 지배권을 비롯, 1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지배권과 전쟁 지휘권, 또한 장쭤린의 영토에 대한 명목상 통치권[* 즉 우한 정부와 펑위샹이 힘을 합쳐 장쭤린을 몰아내면 그 영토를 펑위샹이 지배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과 금전적 지원도 받아냈다.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에 밀려 애가 타던 왕징웨이는 펑위샹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펑위샹은 왕징웨이 앞에서 장제스를 "늑대의 심장에 개의 폐를 가진 냉혹한 놈"이라고 욕하며 왕징웨이를 잠시 안심시켰고 공산당은 이를 국공합작 통일전선의 승리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조건을 붙였다. 다름 아닌 소련 고문들을 귀국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우한 정부에서 축출하라는 요구였다. 왕징웨이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요구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배신|6월 19일 쉬저우에서 펑위샹은 장제스와 악수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자기 휘하의 공산당원들도 모조리 해고해버리기로 결정, [[덩샤오핑]] 이하 공산당원들을 불러 은화를 몇푼씩 나눠주고 시안에서 추방했다. 펑위샹은 즉각 자기 통치 지역에서 반장 포스터들을 모두 떼어냈고,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매달 200만 위안의 지원금과 허난 성의 통치권을 주었다. 펑위샹과 동맹을 굳건히 한 장제스는 공산당 사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본 옌시산도 장제스에게 붙었다. 한편 계속된 경제위기와 [[마일사변]]을 비롯한 군사반란에 직면했던 우한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의 무장, 우익 장교 숙청,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전달받고 7월 15일 분공을 결정했다. 7월 13일 공산당 역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국공결렬]]이 일어나 1차 국공합작은 완전히 종결되었고 공산당이라는 장애물이 없어짐에 따라 우한과 난징 정부가 통합을 결정했다. 이를 [[영한합작]]이라고 하는데 우한의 요구에 따라 장제스는 사퇴하지만 장제스의 빈자리를 놓고 [[서산회의파]], 광서파, [[개조파]] 등이 다툼을 벌이다가 양호와 안휘를 지배하던 [[탕성즈]]는 [[당계전쟁]]으로 퇴각하고 광서파, 광동파도 [[장황사변]]이니 [[광저우 폭동]]이니 난징 참안이니 하는 사건들로 입지가 좁아져 결국 장제스의 복귀를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장제스는 1928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재추대되었고, [[카이펑]]에서 펑위샹, 옌시산과 회담을 가졌는데, 이때 장제스와 펑위샹은 의형제를 맺었다. 나이가 많은 펑위샹이 당연히 형이었다. 여러 군벌들의 합류로 1928년 4월 7일 장제스가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포했을때 1차 북벌때 10만에 불과했던 국민당의 군세는 100만으로 불어 있었다. 당연히 장제스의 좌우엔 펑위샹과 옌시산이 있었다. 산둥의 장쭝창은 무참히 깨져서 베이징으로 달아났고 우페이푸는 쓰촨으로 달아났으며 쑨촨팡은 [[다롄]]으로 튀었다. 장쭤린은 대원수가 되어 결전을 각오했으나 장제스의 군대를 막을 순 없었고 결국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만주를 삼킬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복종할 것을 천명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물론 세간의 설명과 달리 장쉐량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반일감정에 불타는 인물이 아니라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만주와 일본의 관계 자체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관동군은 [[양위팅]]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 욕하면서 만만해보이는 장쉐량의 승계를 적극 지지했다.] 펑위샹은 베이징을 점령할 뻔 했으나 펑위샹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옌시산에게 베이징 입성을 명하면서 베이징에 돌아올 기회는 잃고 만다. 이후 펑위샹은 동북역치 과정에서 장쭤린에 대한 원한 때문에 봉천군벌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장쉐량이 국민당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후에도 장제스, 옌시산과 합작하여 펑위샹을 견제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중원대전]]에서 장제스에게 합류하는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