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위샹 (문단 편집) === [[반장전쟁]]과 몰락 === ||[[파일:external/en.people.cn/P201003181546207753146121.jpg]]|| || 1928년의 펑위샹 ||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은 국민당의 손에 들어왔다. 장제스가 국무회의 주석, 후한민이 입법원장, [[옌시산]]이 내정부장, 펑위샹은 군정부장 및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장제스가 철권통치로 다스리는 일사분란한 정당이 아니었고, 어제의 동지였던 여러 실력자들은 전리품을 놓고 침을 흘리며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제스는 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방세력들의 힘을 줄이고 경제개발을 위해 군축을 실시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시된 정치분회 폐지와 편견회의의 실시에서 결국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의 군벌들과 [[왕징웨이]], [[쑨커]] 등의 국민당 내부 반장 세력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928년 7월 11일의 [[편견회의]]에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4인은 200만에 달하는 국민당군을 80만으로 감축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인 감축안을 두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반이 되는 군대를 줄인다는 계획에 군벌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결국 누적된 불만은 1929년 2월,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이 무단해임된 [[호남 사건]]이 계기가 되어 3월 [[1차 장계전쟁]]을 시작으로 불이 번졌다. 이 시점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상화이라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29년 5월 펑위샹도 반기를 들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제스는 잽싸게 펑위샹 휘하의 [[한푸쥐]] 등을 매수하여 펑위샹의 군세를 붕괴시켰다. 이에 펑위샹은 잠시 옌시산에게 몸을 의탁하여 샨시로 후퇴했고 이때의 반란은 옌시산의 중재로 끝났다. 하지만 펑위샹은 그리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장제스에게 진압당했지만, 펑위샹은 10월에 다시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탕성즈]]를 파견하여 재차 진압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1930년 3월 옌시산이 리쭝런, 장파쿠이, 바이충시 등 군벌들에 우페이푸나 쑨촨팡의 잔당들, 반장의 기치를 든 왕징웨이, 쑨커까지 끌어들인 초대형 반란인 [[중원대전]]에 동참함으로써 또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최대의 위기에 빠진 장제스는 약법 문제를 처리하면서 [[산둥성|산둥]]에서 옌시산의 병력을 섬멸하여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장쉐량]]이 옌시산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장제스에게 가담하면서 결국 중원대전도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리쭝런, 옌시산 등이 기반을 사수한 것과 달리 펑위샹은 기반을 모두 날려먹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펑위샹은 산둥에 칩거했고 그의 옛 부하들은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