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위샹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최후 ===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 등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선안내 후양외 정책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5년 [[스젠차오]]가 [[쑨촨팡]]을 암살하자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 이후 무주공산이 된 화북의 군정대권을 정리하기 위해 [[옌시산]]과 공동으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계속된 반장행동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 이 때문에 1936년 [[시안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명목상 장제스의 군사위원장 직위를 대리했지만 실권은 토역군 사령관 [[허잉친]]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펑위샹은 일선에 복귀, 3전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화북에 설치된 6전구 사령관도 겸했다. 하지만 [[베이핑-톈진 전투]], [[베이핑 탈환전]]에서 잇달아 패배, 9월 24일에 바오딩이 함락되고 10월 10일에 스좌장이 함락되면서 화북을 날린 펑위샹의 6전구는 폐지되었다. 펑위샹은 이에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군, 화북과 동부 해안가의 주요 대도시를 모조리 점령했다. 일본에 대해 가장 강경하던 펑위샹도 이 상황에서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한탄했다. 다행히도 중국은 이후 무려 8년을 버텼지만, 장제스에게 단단히 찍힌 그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명함만이 주어졌을 뿐 중일전쟁 내내 그럴듯한 일을 맡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장제스와 장제스를 지원하는 트루먼 행정부를 비판하고 <내가 아는 장제스>란 책을 통해 장제스를 비방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장제스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발행했다. 1948년 미국에서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소련 국적 여객선에 올랐으나, [[흑해]] [[오데사]] 항구에서 선박 화재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를 애국 군벌로 높이 평가하면서 1949년 9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주관으로 그의 1주기 추도식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타이산]]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그의 아내 리더취안(李德全)은 [[중화인민공화국]] 위생부장([[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태산에 가면 그의 묘지를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