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다이 (문단 편집) == 발단 == 시작은 누가 뭐라해도 1948년의 1차 중동전쟁이다.[* 팔레스타인의 일부 역사가들은 이게 다 1897년의 바젤 시온주의자 회의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체 무장세력,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주축이 되고 아랍 각국에서 의용대까지 몰려와서 수적, 화력으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아랍군이었으나 사분오열된 지휘체계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단합이 안되었기에 지지부진했고 결국 패배했다. 자세한 정황은 [[제1차 중동전쟁]] 항목 참조. 전쟁 이후 가자 지구는 이집트 왕국에 소속되었다.[* 4년 후 쿠데타로 공화국이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의 총칼과 전쟁을 피해 2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가자 지구로 몰려들었고 가자의 인구는 순식간에 3배로 불었다. 당연하지만 가자 지구는 원래 팔레스타인의 중심지역 따윈 아니었고 한꺼번에 몰려든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감당할 여건이 전혀 안되어 난민들은 잠잘 걱정에서 식량 부족,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현재도 가자지구는 척박하고 좁은 땅인데 거주인구가 지역보다 더 많아 인구포화상태다. 특히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봉쇄로 인세지옥이다.]한동안 움집을 세우고 거의 원시인처럼 생활했으나 곧 도움의 손길이 오기 시작했다. 유엔과 국제 퀘이커 교도 협회에서 천막과 텐트를 지원해줬고 밀가루를 분배해주었다. 이집트 군인들은 싼값에 빵을 팔기도 했다.[* 하지만 조 사드의 기록에 따르면 곰팡이 난 먹지못할 빵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힘겹게 살아갔는데, 고철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물을 긷기 위해 수킬로미터 씩 걸어야 했고 기생충들로 인해 고생해야 했다. 1949년말 UNWRA가 설립되어 퀘이커 교도들을 대신했다. 그들 덕분에 상수도와 수도관이 설치되었고 화장실도 세워졌다. 이 무렵부터 텐트들이 아랍 전통 방식으로 지은 진흙집으로 대체되었고[* 왜냐면 난민들은 현대식 건물로 지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난민캠프는 거대한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현재 가자 지구의 시초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이 열악한 것은 여전했는데 1949년 이스라엘 외무부의 보고서를 보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 "...자연선택 과정에서 생존한, 적응력이 뛰어난 일부 난민들은 잘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는 도태될 것이다. 일부는 사망하고 대다수는 인간쓰레기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아랍 국가의 극빈곤층에 편입될 것이다." || 난민들은 빈약한 원조와 껌값 수준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특히 땅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남자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종일 놀아야만 했다.[* 왜냐면 이집트도 이 당시에 어려웠기에 난민들을 위한 일자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현재도 이집트는 경제사정이 어려우며 이집트에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빈곤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있으니 불과 몇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그들이 대대손손 일구어 온 땅과 살아온 집이 있으며 밭에는 작물이 익고 있고 집에는 식량과 석유가 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의 경계가 허술하기 그지 없었고 철조망 따윈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난민들은 너도나도 할것없이 이스라엘로 잠입해서 농작물과 가축 등을 데리고 가자 지구로 돌아왔다. 일부 대담한 난민들은 이스라엘 군 초소를 습격해서 식량과 설비를 약탈하기도 했고 일부는 이스라엘을 횡단하여 웨스트뱅크까지 가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난민들은 '감시도 허술하네.'하면서 이스라엘에 눌러살기도 했다.[*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들도 이스라엘에 살게된 것이 이런 사유가 많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엔 엄청난 숫자의 이민이 쏟아지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반동으로 살곳이 절실해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과 난민들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난민들이 자꾸 자신들의 영토로 오는것이 싫었기에 국경 수호부대에게 월경자를 무조건 죽일 것을 지시했다. 결국 1949년에만 1000여명의 난민이 살해되었다. 1951년 여자, 아이들, 항복하는 자들은 쏘지 않도록 규정이 수정되었으나 ~~아니 이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난민에게 무자비한 이스라엘군이 제대로 지킬리가 없었다. 그후로도 1956년까지 2700명에서 5000명의 난민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격과 그들이 심어놓은지뢰를 비롯한 부비트랩으로 죽었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비무장이었다. 하지만 일부 예외도 있어 무장한 난민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을 품고 이스라엘로 잠입해서 식량을 훔치는 과정에서 마주친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군인, 경찰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돌아오곤 했는데 죽은 유대인의 숫자가 300명에 달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정부는 가만놔둘수가 없어 더욱 궁극적이고 강력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당시 모셰 다얀 육군 소장의 보좌관 바온 모르데하이 전 국장은 이스라엘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복 작전의 핵심은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주된 고려 사항은 상대방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치는 것입니다. 뭘 해서든 상대편 군을 압박하고 침입자를 단속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자신들의 생사와 존망이 걸린 일이니 유들유들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이들은 아랍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아랍국가들에게 국경단속 좀 잘하라는 의미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보는 데로 때려잡았다. 최악의 사건은 1953년 퀴비야 마을 학살 사건으로 아리엘 샤론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유대인 여자 한명과 아이 두명이 살해된 일을 보복하기 위해 웨스트 뱅크로 진입하여 42명을 죽이고 마을을 모두 폭파시켰는데 희생자 중 38명이 여자와 아이들이었고 모두 저항한 흔적이 없이 잠을 자다가 총을 맞았다. 세계 여론이 들끓자 이스라엘의 반응은 '''"쳇, 민간인을 죽이면 시끄러우니까 군인과 경찰을 죽이면 되겠군"'''이었다. ~~애당초 전쟁 상태도 아닌데 상대방 군인을 죽이는게 잘하는 일이라곤 못해도 이딴 생각을 왜 진작에 못한 걸까?~~ 그런데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애들을 조지거나 말거나 의외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측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단속해 달라고 해도 듣은척도 안했다. 트히 누구보다도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나세르였다. 바온 모르데하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신경 쓸 필요도 없다."라는 것이 나세르의 반응이었다. 나세르에겐 아랍 전체를 묶어야 할 판에 그까짓 가자 지구나 웨스트뱅크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1955년 2월 28일까지는.[* 당연하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집트에 대한 감정은 나쁘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가자지구 주민들의 땅굴을 파괴하여 넘어오지도 못하게 하며 제한적으로만 거래하게 하는것 때문에 팔레스타인 내에 반이집트 감정이 굉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