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다이 (문단 편집) === 1955년 2월 28일 === 이 남자는 베두인 족의 양떼가 휴전선에서 풀을 먹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스라엘 지프가 다가오자 그는 베두인들을 황급히 불러들였으나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져 양 두마리가 죽었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의 도발에 매우 불쾌해했지만 오히려 남자에게 이스라엘에 총알값을 물어내란 명령을 내리고 그의 승진이 취소시켰다. 그래서 남자는 보복을 결심했다.[* 총알값은 양 주인이 갚았다고 한다.] 그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지프 두대를 파괴하고 탑승자들을 모두 죽인 다음에 무기를 약탈해서 돌아왔다. 그런데 두번째 지프를 파괴했던 사건에 국제 감독관이 나타나 그의 사진을 찍었고 이스라엘 기관총을 맨 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 사내의 얼굴이 정면으로 찍혔다. 이스라엘은 얼씨구나를 외치면서 이스라엘의 도발에 항의하는 이집트를 몰아세웠고 UNTSO가 남자의 사진을 증거물로 제출하자 이집트는 궁지에 몰렸다. 분노한 이집트는 남자를 칸 유니스 감옥에 가뒀는데 당시 이스라엘에선 일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이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손을 봐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때마침 1955년 2월 25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이스라엘 민간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둘은 의기투합하여 온건파 총리 모셰 샤레트를 찾아가 보복 작전을 요청했다. 다얀은 공격이 통상적인 수준으로 이집트인들의 사상자는 최대로 잡아봐야 10여명에 그칠 것이라고 주장했고 샤레트 총리는 공격을 승인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워낙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공격이었다. 1954년 말부터 55년에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트집 잡힐 빌미를 주기 싫었던 이집트는 가자 지구의 국경 단속을 철저히 하여 허구한 날 이스라엘로 넘어가서 약탈을 벌이는 팔레스타인 군인은 물론 난민들까지 통제하는데 성공했고 UNTSO의 캐나다 대표 번스 중장이 "역사상 이렇게 조용한 시기를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1955년 2월 28일 이스라엘 공수부대가 이집트를 쳤다. 소규모 군부대와 기차역을 파괴하고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사건이 크게 터졌다. 이집트 군대가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공수부대원 8명과 이집트 수비대 16명이 죽었고 애꿎은 민간인 두사람이 지나다가 휘말려서 죽었다. 한편 지원병력을 막기 위해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트럭을 습격해서 22명의 이집트 군인을 죽이고 13명을 부상시켰다. 이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아랍 공습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