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다이 (문단 편집) == 이스라엘의 반격 ==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치 않으나 페다이가 결성되고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은 다섯명의 군인과 1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이스라엘을 흔들어 놓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고 이집트 국경지대의 정착민들이 겁을 먹고 이사를 떠나서 일부 정착촌이 텅 비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페다이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1955년 8월 31일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가자지구의 칸 유니스 경찰서를 폭격했다. 이스라엘의 맹폭으로 경찰서 전체가 무너져내렸고 이집트는 72명의 군경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며 유엔 감시관은 그 중 36명의 사망을 확인했다. 놀란 나세르는 페다이들의 출격을 유보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가 이스라엘보다 강하단 생각을 버리진 않았다. 1955년 9월 나세르는 체코, 소련과 군사 협약을 맺었고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이스라엘은 온건파 샤레트 총리가 강경파인 벤구리온 총리로 교체되었고 벤구리온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강경파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모세 다얀을 비롯한 고위층은 예방 공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벤구리온은 강경파이긴 해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고 섣불리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미국, 영국, 프랑스가 반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 부분에서 바온 모르데하이 전 국장이 진술했는데 벤구리온은 확전될 가능성이 있는 선제공격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지만 보복만 강화하면 나세르가 쳐들어올 수도 있고 그러면 이스라엘이 명분상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최소한 누가 전쟁에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게 된다는 다얀의 주장을 받아들여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 전체에 보복 작전을 감행했고 수십명의 아랍인이 죽었으며 이집트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나세르는 침묵을 지키고 상태를 방관했다. 예상외로 신중한 나세르 때문에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이스라엘은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신형 무기를 주문하는 한편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1956년 4월에 이집트인 1명과 이스라엘군 4명이 죽은 불상사를 빼고는 전선은 조용하게 유지되었는데 1956년 4월 5일 이스라엘 군이 이집트 군부대로 박격포를 쐈는데 이집트가 반격하면서 분쟁이 터졌다[* 정확하게 말해서 누가 먼저 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스라엘 - 이집트ㅡ 휴전 연락 위원회의 위원장인 바야드 미군 중령은 포를 쏜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이나 민간인을 쏜 것은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다고 증언했다.]. 이집트는 군부대 뿐만 아니라 키부츠를 목표로 포격을 하여 피해를 입혀 이스라엘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 모셰 다얀은 길길이 날뛰었고 가자 지구에 대대적인 포격을 감행했다. 그의 전술은 모든 주요 도로에 군중이 밀집한 때에 쏜 다음에 몇분 후 군중이 다시 모이면 다시 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사상자를 많이 내는 옛날 수법'이라는 것인데 이 공격으로 15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3분의 1이 사망자였다. 이번에는 나세르도 열받았고 즉각 페다이들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병원에서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신을 목격하고 극도로 분노한 페다이들은 이스라엘로 잠입하여 56년 4월 7일부터 12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10여명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샤피르 협동농장을 습격해서 어린이들도 모조리 죽였다. 하지만 페다이들의 잔혹함에 시작은 이스라엘이 먼저 시작했음에도 이집트는 세계의 비난을 받았고 페다이들을 도로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