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루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페루의 역사)] [[15세기]] 케추아 족의 [[잉카 제국]]이 탄생한 곳이다. [[잉카]]의 영역은 현재의 [[콜롬비아]] 남부에서부터 [[칠레]]의 중부 지방과 [[아르헨티나]]의 살타, 후후이, 멘도사 주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방대한 [[남아메리카]] 대륙 내의 영토들을 지배했다. 잉카의 중심지 쿠스코와 멀리 떨어진 [[브라질]] 북부 아마조니아에서 몇몇 부족은 잉카에 느슨하게 종속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문명이 발전하기도 했었다. 물론 [[포르투갈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브라질 북부 바이아 주에 도착했을 땐 이들은 이미 쇠퇴한 종주국 잉카의 영향으로 쇠퇴해서 지리멸렬한 지 오래였다. 최근의 [[잉카 제국]]에 묻히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문명이 나타나서 이미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노르테치코 문화가 등장하였으며 섬세한 문화같은 건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복잡한 도시국가들의 존재가 암시된다. 물론 이들 모두는 부족국가 수준에 불과했다.이후에 여러 거대한 건축물들을 보아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한 강력한 국가들도 나타났던 걸로 여겨지며 나스카 지상화등 페루의 많은 유적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당시에 존재하였던 치무 왕국이나 와리 제국 같이 강력한 국가들과 지도자들에 대한 전설들이나 설화, 신화, 서사시 등이 원주민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고있지만 발달된 형태의 문자는 없어서 중앙아메리카의 문명과는 다르게 이 당시의 국가에 대한 기록물들은 거의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이며, 단지 남겨져있는 그림이나 유적 등으로 그 형태를 추측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이 잉카 시대에 있었던 일인 양 전해져 내려오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잉카 제국 이전의 페루 역사는 고고학적인 유적 발굴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페루 하면 유명한 [[잉카 제국]]은 13세기 초에 건국되었다. [[잉카 제국]]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으며 북으로는 [[콜롬비아]] 남부, 남으로는 [[칠레]] 중부와 [[아르헨티나]] 북서부, [[브라질]] 및 [[볼리비아]] 아마조니아에 영토가 이를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전성기가 시작된지 90여년만인 1532년 [[스페인]]에서 온 [[콩키스타도르]]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공격을 받아 국왕 [[아타우알파]]가 죽고 계속 [[스페인]]에 맞서 항전하다가 1572년 잉카 제국이 멸망한다. 이후 300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국의 중심이 페루에 있었기에 지금도 페루는 잉카 제국의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이 강하다.[* 관광이라던가 자국 홍보에 잉카 제국을 많이 끌어다 쓰는 편이다.] 물론 비슷하게 잉카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던 여타 [[남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국가들[* [[에콰도르]], [[칠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심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도 일부 지분을 주장한다.]에서는 무슨 개소리하냐며 잉카 문명은 [[남아메리카]] 대륙 공통의 역사라고 페루의 잉카 문명 종주국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물론 페루에서는 이러한 다른 남미국가들의 반발에 "너희네 나라들은 잉카 제국 시절에 변방 노예들에 지나지 않았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거기다 스페인 압제자들의 악랄한 탄압에 맞서 잉카의 문화와 전통을 현재까지 수백년간 지켜낸 것도 페루인들의 공이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정통성 면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스페인]]은 우상숭배를 없애고 [[기독교]]를 전파한다며 신전을 때려 부수고 신상 등은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 [[유럽]]으로 싣고 갔다. 이후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오늘날에는 볼리비아의 영토]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고 은 채굴법이 발달하면서 이 지역에서 채굴된 은은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유럽에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 페루 부왕령에서는 가혹한 엥코미엔다 제도로 소요가 끊이지 않았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원주민 독립운동가인 [[투팍 아마루 2세]]가 잉카 부흥운동 등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스페인군]]에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 등이 [[남아메리카]]에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독립전쟁]]의 열풍을 몰고 오자 스페인의 페루에 대한 식민 통치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지막까지 스페인의 남미 대륙 유일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페루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1821년]] [[7월 28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1824년]] [[12월 9일]]에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완전한 독립 선언을 달성하였다. 페루와 아르헨티나, 칠레를 해방시킨 산 마르틴은 [[시몬 볼리바르]]와 과야킬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진 직후 갑자기 [[프랑스]]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정작 그 근방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지역에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시몬 볼리바르]]가 페루를 해방시켰다. 동시에 같은 시기에 칠레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아르헨티나는 [[마누엘 벨그라노]]가 산 마르틴 대신 남미 각국들을 해방시켰다. 아직까지 왜 산 마르틴이 굳이 이 세 사람에게 각국의 [[독립운동]]을 떠넘기고 떠났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과야킬 정상회담에서 배석자 없이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 단 둘이서 밀담을 나눴기 때문에. 항간에선 볼리바르와 대립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공화제 형태의 독립국가 수립을 주장한 시몬 볼리바르나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와 달리, 산 마르틴은 유럽의 왕족 가문을 초빙하여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국 건설을 주장했다.] 다른 항간에선 산 마르틴이 너무 지명도가 높아져 목숨에 위협을 받아 망명을 택했단 일설도 존재한다.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페루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진 않고 따로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1830년대]]에는 잠시 [[볼리비아]]와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만들기도 했으나 주변에 강대한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경계하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견제와 볼리비아와의 합병에 반대한 페루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그야말로 정권수립! → 무너지다! → 정권수립! → 무너지다!의 연속의 정치 혼란을 겪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대립, 리마 중심주의자들과 쿠스코 중심주의자들이 대립이 이어졌으며 20세기 때는 군사 [[쿠데타]]와 군부독재, 경제위기가 연속되었다. 80년대 말 페루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마오주의]] 성향의 [[빛나는 길]] 반군이 페루의 수도였던 리마를 포함한 전 국토의 반 이상을 장악하여, 전국적인 [[인민전쟁]]이 벌어졌는데,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강경 진압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빛나는 길의 지도자였던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되면서 내전은 잠잠해진다.[* 참고로 구스만과 후지모리 모두 결국 감옥에 가게 된다. 이후, 구스만은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후지모리는 건강 문제로 사면된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제 상황도 개선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지 못하다. 2022년 12월에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후 [[페루]]에서 한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여파로 2023년 1월 중순까지 [[관광객]]들이 오가는 [[마추픽추]] 근처 [[공항]]이 여러 차례 [[습격]]당하자 페루 정부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마추픽추를 전격 [[폐쇄]]한다고 발표'''했으며 유적지 안에 갇혀 있던 관광객 4백여 명을 공항 근처로 대피시켰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05322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