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이퍼코리아 (문단 편집) == 역사 == [youtube(u7Dtt5TtNbA)] 일본 대표 제지회사였던 [[오지제지]](王子製紙)가 함경북도 길주에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자회사로 1934년부터 공장 건설을 시작하여 1935년 12월 시설 완공 후 시험가동에 들어갔는데 당시 자본금 2,000만원이 들었고 최초 500만원이 납입되었다.오지제지가 50% 지분 보유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등이 출자하였다. 이것은 북선제지가 당시 식민지 공업화를 추진하던 조선총독부와 맞물려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화신백화점]]의 [[박흥식]]도 대주주로 참여하였다 한다. 초반에는 연간 펄프 2만톤 가량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이후 시설을 확장하며 2만 7천톤 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며 일본 전시체제기에는 주요 군수공장의 역할도 하였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북선제지화학에 제2공장 건설을 종용한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선박 부족 및 일본 내 생산능력 저하로 제지의 수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북선제지화학은 당초 방직공장 건설을 위해 조성했던 군산의 공장부지에 1943년 1,000만원 규모로 공장 건설을 계획하여, 44년 10월 제지 공장을 완공 후 조업에 나섰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정은 군산공장을 적산으로 인정하여 귀속시켰다.[* ~~소련군정 때문에~~ 북선제지화학공업 전체가 아닌 군산의 제지공장만을 귀속했기 때문에, 회사의 설립기점을 북선제지화학공업이 설립된 1935년이 아닌 군산공장 완공 가동일인 1944년으로 보게된다.] 당시 미군정은 경성고무회사 이만수[* [[KBO 리그]]의 산파 역할을 했던 '군산야구의 대부' [[이용일]]의 부친.] 사장을 공장 관리자로 임명했으나 이 사장이 미군정과 소통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가 일어나자 관리직에서 물러나고 그 뒤로 전주중 교사였던 김원전씨가 2대 관리직에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되고 규모가 점차 늘어나며 당시 국내 제지업계를 주도하였다.[* 당시로서 최첨단인 장망식 초지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한다.] 한국전쟁 동안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뒤로 공장 복구에 힘 써서 51년 정상가동을 시작했으며 정부에서도 당시 지류 수급문제가 커지자 해당 공장에 막대한 원조자금을 투입하였다 한다. 다만 당시 위기가 왔는데 해당 공장을 불하하는 문제였다. [[김원전]]씨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 내각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한 사학재단에서 해당 공장을 불하받으려 했고 그걸 가만히 앉아서 뺏길 수 없었던 김원전씨가 우자형씨와 연합신문과 힘을 합쳐서 결국 낙찰을 받아 인수를 했고 1954년 '''고려제지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며 초대 사장에 김원전씨가 취임하였다. 그러다 동업을 하던 우자형씨와 관계가 끊어지고 김씨의 1인 경영체제로 바뀌게 되었고 당시 정부의 제지공장 부흥계획에 따라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엔 풍국제지란 회사를 인수하면서 신문용지 외 편면지 공장까지 거느리게 되고 1966년에는 연간 생산능력 2만 톤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로도 동원탄광, 부간산업, 수중광업, 한양수산 등 여러 회사를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지만 너무 문어발식 확장을 한 것에 더불어 사장인 김원전씨가 정계에까지 진출하려 하는 등 욕심을 부리면서 기업의 쇠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특히 5.16이후 군사정권이 고려제지에 대한 자금지원 중단을 해버리는 등 지원이 거의 사라져버렸으며 경영난에 고려제지는 정부에 상업차관을 신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차관을 한 푼도 받지 못했고 고려제지는 생산실적이 점차 감소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임금까지도 밀리는 상황에 이른다. 종업원들까지 공장 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당시 정부에선 1972년 9월 고려제지를 공매처분하고 주채무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12억원에 낙찰을 받게 되면서 고려제지는 망하게 되었다. 조흥은행은 1973년이 공장을 공매 입찰에 넘겼고 [[고판남]]씨가 1962년 11월 창립한 '''한국합판'''이란 합판회사가 37억 7,000만원에 입찰받았고 고려제지의 고용승계를 하면서 새 주인이 되었다. 동 년 3월 한국합판은 제지산업을 전담할 '''세대제지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니 당시 고려제지의 경영난을 발판 삼아 [[전주제지]]가 국내 1위 자리를 빼앗았고 세대제지 측에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하였으며 당시 일본 오지제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6년 세대제지의 한 간부가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오지제지 공장 중 하나인 도마꼬마이공장에서 약 1개월간 선진제지기술을 배우던 중 신형 박피기인 드럼바커(Drumbarker)의 설계도면을 얻어와 국내 최초로 군산공장에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신형 박피기는 처리시간 대폭 단축 및 전력소비와 소음문제까지 해결하는 효용성을 보였고 나중에 전주제지가 세대제지를 본떠서 자기들 공장에서 드럼바커를 설치했다고 한다. 1981년 세대제지는 고판남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아들인 고병옥 부사장을 사장으로 취임시키며 2세 경영체제로 돌입하였다. 1981년 고판남 회장이 3월 25일 열린 제11대 총선에 군산시·옥구군 지역구로 해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기 때문기도 했다. 고병옥 사장이 부사장 시절 초지기를 3호기까지 늘리고 최신예기기라 불린 N-1호 초지기까지 도입하면서 생산능력면에서 동종업계 중 1위로 재등극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다. 그러다 1985년 한국합판은 국제 경쟁력 제고 및 계열기업 재편성 목적으로 세대제지를 흡수합병하고 회사명을 '''(주식회사) 세풍''' 으로 바꾸었다. 당시 합판산업이 70년대 후반 기준으로 고비를 겪으며 사양화되는 분위기라 합판 감산을 위해 합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서 제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려 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또 다시 전주제지가 생산시설 증설로 세풍에 위기가 찾아오자 세풍 측에선 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해 1990년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N-2호 초지기 도입계약 체결을 맺었고 92년 9월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다시 세풍의 연간 생산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풍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계열사를 무리하게 늘리는 과정에 자금난에 봉착하며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매각작업을 진행하게 된 채권단 및 회사는 2002년 10월 정보통신업체이던 버추얼텍과 2023억원에 매각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는데 이에 대해 제지와 전혀 다른 업종 회사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버추얼텍이 어떻게 자기보다 10배 가량 큰 규모의 세풍을 인수한 것인지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었다. 버추얼텍은 구형우 전 [[한솔그룹]] 부회장을 회장으로 영입해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했고 2003년 2월 회사 이름을 세풍에서 현재 사명인 '''페이퍼코리아(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2017년 연합자산관리주식회사인 유암코에서 최대 주주로 경영권을 인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