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견회의 (문단 편집) ==== 준비와 개막 ==== >"개회에 즈음하여 나는 일본의 유신 역사 중에서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의 네 웅번이 당시 스스로 처리한 길, 그들의 군제개혁의 경과와 그들의 개혁정신을 상세히 말하여 우리 군사 동지의 참고로 삼고자 한다. 일본은 우리 중국에 대하여 침략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말할 때마다 분개를 참을 수 없다. 특히 [[제남 사건]] 발생 후에는 온 나라가 일본을 원수로 삼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분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일본이 왜 중국을 침략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 >(...) > >그 이유는 일본이 유신 초에 건전하고 온고한 통일정부를 조직하고 현대적인 국가의 완성에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겠는가. 첫째는 통일이요, 둘째는 집중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 등 제번의 중견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막부를 넘어뜨렸다. 이것은 우리 각 집단군이 일치 협력하여 극악한 [[북양정부|북양파]]를 타도한 일과 흡사하다. 막부 타도 성공 후 일본의 역사의 선례를 보면 조슈, 사쓰마 두 번이 도쿠가와를 대신하여 흥륭해야 할 것이었으나 죠슈 번사 [[기도 다카요시]], 번주 모리 다카치카, 사쓰마 번사 [[오쿠보 도시미치]],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등은 대의를 분별하고 결연히 [[대정봉환|대정을 봉환]]하여 중앙에 귀명했다. 막부 타도가 성취되고 [[폐번치현|폐번이 이루어지고]] 전국통일이 완성되었어도 일본조정에는 여전히 한 병졸도 없었다. 번의 장병은 모두 번주와 군신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유신의 제걸은 이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했다. 번병을 국군으로 개편한 것이다. 첫째로 각 변의 병력을 제한하고 둘째로 수도방위에 친병을 두었다. 셋째로 번의 경계를 제거한 후 혼합, 개편하고 진대를 나누어 설치하여 집중훈련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차츰 국군의 기초를 확립하고 반동 세력을 진압하여 전국통일이 명실상부하게 갖추어지고 나서 중앙정부는 비로소 일체의 정치개선에 착수했다. 이 같은 실적은 우리가 충분히 모방할 만하다. > >(...) > >일본의 군인은 60년 전에 봉건제도를 타파했다. 중국의 군인은 반대로 봉건사상을 팽배시키고 병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모두 사병을 늘리고 지반을 확장하려 했다. 한 성의 지반을 얻으면 다시 수개 성에서 할거하려 하고 수개 성을 차지하면 이번에는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을 장악하려고 했다. 중앙을 장악한 뒤에는 자기 일파의 세력을 확장하고 타파에 대해서는 무력으로써 배제하려고 했다. 이것은 북양군벌의 노조 [[위안스카이]]를 선례로 하여 [[돤치루이]], [[우페이푸]]가 의발을 이어받아 실행해온 일이다. 따라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세력권 분배에 열을 올리는 일이었다. 중화민국을 사유재산으로 하여 분할한 것이다. 일본의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의 제번은 막부 타도 후, 그 공로에 눌러앉지 않았고 다시 막부를 설치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반대로 선조 이래의 봉토를 정부에 봉환했던 것이다. 그들은 새 지식을 추구하고 시류에 잘 부응하고 완전히 국가와 일체가 되어 공존공영을 꾀했다. 우리는 일본의 웅번을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 >1929년 1월 1일, 장제스 이후 무산되어버린 군사선후회의를 위해 국민정부 인선이 마무리된 10월 말에서 11월 초부터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옌시산에게 1929년 초에 열릴 편견회의 참석을 독려했으며 11월 4일 장제스, 펑위샹, 허잉친이 옌시산과 장쉐량에게 난징에 올 것을 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후 11월 중순, 국민정부는 군사회의를 12월 초에 소집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이때 국민정부는 군사회의에서 각집단군의 취소, 각집단 별 군대 현황 보고, 전국군사비 확정과 예산의 실행 방안, 개편 후 군대 배치 문제 등을 논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옌시산과 리쭝런의 불참과 준비작업의 미비가 겹치므로 연말 개최로 연기되었다. 이후 12월 12일 옌시산이 드디어 난징에 도착하였으나 리지선과 리쭝런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회의를 위한 사전 조정 기간에도 시간이 소요되어 회의는 1929년 1월 1일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편견회의의 개막식에서 채택된 편견위원회개회선언은 오중전회에서 통과된 정리군사안에 근거, 군제, 군대수, 군비, 군구 확정 등 조례에서 규정한 직무 수행을 위해 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실제적인 군사적 수요와 국가재정의 부담 능력을 고려하여 공평한 편견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2. 각 집단군에서는 군대수와 군장비에 대하여 성실하게 공개하고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엄격한 점검과 검사를 시행하여야 한다. 3. 재병운동을 구호로 내걸고 국가재정을 낭비하거나 개인적 축재를 해서는 안된다. 4. 군벌들의 구습을 일소하여 중도에서 흐지부지하게 되지 않도록 철저한 편견을 해야 한다.|| 이날 장제스도 담화를 발표, 편견회의가 탕산회의에서 영수들이 합의서명하여 제안한 군사정리안을 오중전회가 받아들여 다시 영수들에게 시행하도록 위탁한 것이니 군사정리, 군대편견, 편견군대의 안직 등에 있어 공동협의하여 일인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각 집단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