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견회의 (문단 편집) === 상무위원회의 활동 === 편견회의 폐막 이후 합의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상무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월 29일 리지선이 상하이로 떠나고 2월 4일 펑위샹이 타이위안으로 돌아가버리는 등 집단군 영수들이 차례로 난징을 떠나버렸고 2월 2일로 계획되었던 상무위원회 발족은 미루어져 2월 5일에야 1차 회의가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상무위원회 소속 위원은 장제스, 리쭝런, 허잉친, 탄엔카이, 쑹쯔원 5인 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2월 8일 2차 회의에선 장제스, 허잉친, 리쭝런 3인이, 2월 15일의 3차 회의에는 허잉친, 탄옌카이 2인만이 출석하고 나머지는 각부 부주석이나 주석 대리들을 비롯한 열석자들만 가득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상무위원회의 활동은 시작부터 크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차 회의에선 편견구 성립을 3월 16일로 정하고 3월 15일 이전까지 기존 국민혁명군총사령부, 각 집단군총사령부, 해군총사령부를 철폐하고 각기 병기공장은 4월 1일부터 조업을 중단하기로 결의하였으며 3차 회의에서 주석과 부주석 인선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4집단군 총지휘관인 바이충시가 2월 7일 돌연히 사퇴하고[* 장제스가 그의 사퇴를 만류하는 편지 내용을 볼때 군비 지급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그에게 군비 문제에 관해 쑹쯔원에게 간곡히 말해두었다고 했다.] 옌시산과 난징 국민정부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펑위샹이 2월 18일 난징에 전보를 보내 난징의 제2집단군 장교들과 직원들을 모조리 카이펑으로 철수시키고 삼전대회 불참을 표명하며 3월 12일 군정부장 사직 통전을 발표하면서 가장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여기에 [[호남 사건]]이 발생함으로 광서파와 중앙의 갈등도 폭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