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경 (문단 편집) == 역사 == 한반도에는 12세기 초 [[고려]] [[예종(고려)|예종]]대에 [[북송]]에서 처음 들어왔고, [[공민왕]] 때와 [[태종(조선)|태종]]대에도 [[편종]]과 함께 수입되었다고 한다. 재료가 일종의 [[옥]]인 만큼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조선]] [[세종대왕|세종]]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수입해다 썼는데, 수입만으로는 수요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흙]]으로 빚어서 [[기와]]처럼 구워 만든 개와경도 만들어 썼다. 당연히 흙은 구울 때 수축하기도 하고 구운 후에 조율할 수도 없어 음정은 엉망이었다. 결국 국내에서 백방으로 경석이 나는 곳을 수소문한 결과 세종 7년(1425) [[남양읍|남양]](南陽: 현재 [[화성시|화성]]의 일부)에서 좋은 옥이 발견되었다. 세종 9년(1427)에 처음으로 국산 편경을 제작하였는데, 중국산보다 음색이나 음정이 훨씬 좋았다고 전한다. 이후 현재까지도 편경에 쓰는 옥은 옛 남양인 [[수원시|수원]]과 [[화성시|화성]] 근처 옥 광산에서 캐서 쓴다.[* 이렇게 만들어진 편경을 처음 시연할 때 [[세종대왕]]은 [[박연]]이 만든 편경의 소리를 듣고 夷 음을 내는 돌이 덜 갈려 음정이 잘못되었음을 정확히 집어내어 [[세종(조선)/업적#s-3.4|#]] [[절대음감]]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편경 재료의 산지와 제작기술이 실전되고, 한국에서 재료의 산지를 찾지 못해 대신 중국 방방곡곡을 뒤져 적합한 돌이 나는 산지를 찾아내 재료를 수입해서 제작기술만을 복원했다가 오랫동안 잊혔던 국내 산지를 다시 발견해 다시 국산화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649940.html|#]] 재료가 재료이다보니 악기가 무척 귀해서 편경을 파손시킨 사람은 [[곤장]] 백 대에 3년 동안 [[귀양]]을 보낸다는 형조가 대전통편에 있다. 그리고 대전통편에는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편경을 숨기라는 내용도 있다[* 주로 우물이나 연못 바닥에 경석을 가라앉혀 숨겼다고 한다. 역시 재료가 옥이라 물에 빠뜨리는 정도로 손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악기의 기준음에 해당하기에 편경만 무사하면 나머지 악기를 다시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경이 국보급 악기로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현재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보허자]], [[낙양춘]]에 편성되고 [[취타]]를 대편제로 연주할 때도 간혹 편성된다. 편경과 관련해서 세종대왕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일화가 있는데 박연이 편경과 편종을 새로이 만들고 시험연주를 했는데 이에 세종대왕은 칭찬하면서도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물어 박연이 확인해보니 과연 그 자리는 아직 미처 다 갈리지 않아 먹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갈고 연주했더니 그제서야 소리가 바르게 되었다고 한다. [[분류:국악기]][[분류:타악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