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두 (문단 편집) ==== [[삼한]] & [[신라]] ==== [youtube(HT0p23pDJcI)] 고대 한국의 [[진한]] 지방에서 행해졌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兒生, 便以石厭 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이 기록에 대해 청나라 [[건륭제]]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라는 글을 직접 집필하여 "그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세상을 미혹하게 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면 어른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로 눌러놓는다는 것은 실로 인정상 마땅치 않은 것이다."고 반박하며 "[[만주족|우리나라]]의 옛 풍속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수일이 되면 요람에 두는데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어 머리 형태가 편두(扁頭)처럼 되었다."고 하며 만주족의 옛 풍속을 들어 반박했다. 위의 치누크 족이 편두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돌이나 널빤지로 아기의 머리를 누른다기보다는 아이를 반듯하게 눕혀서 고정시키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한 사람들도 아이 머리를 돌로 누른 게 아니라 딱딱한 요람에다 반듯이 눕혀서 재웠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다만 삼국지에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서술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삼한#s-1.3]] 문서 참조] 실제로 [[김해시]] 예안리 85호 고분에서 편두 인골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편두의 존재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단, 이곳은 진한이 아닌 변한 지역이고,[* 다만 변한과 진한은 제천 행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풍속이 같았다.] 편두가 확인된 유골들은 모두 여성들이라한다. 반면 옆동네 [[금관국|금관가야]]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의 유골들을 조사해 본 결과[* 메인 덧널은 도굴피해가 심해 알기 힘들고 [[순장]]된 사람들의 유골로 조사.] 편두의 흔적은 하나도 없어서 일단 변한지방의 보편적 풍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상북도]] [[경산시]]의 [[임당동 고분군]]에서 편두한 두개골이 발견되어, 삼국지 기록대로 진한에서 편두를 실제로 한 증거가 확인되었다. 현재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골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경주에서 출토되어 [[대한민국의 국보]] 91호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의 주인공이 편두를 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쓰고 있는 관모 바닥이 보통 머리 모양을 가진 사람은 쓸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고, 두개골의 폭이 너무 좁고 이마가 뒤로 넘어가 있다는 것. 다만 이 토기가 편두를 묘사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권오영]] 교수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 개마총이란 고분 벽화에 금동관을 쓴 사람이 편두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편두가 맞다면 고구려에서도 편두 풍습이 있었을 수도 있다.[[http://www.hani.co.kr/arti/PRINT/881436.html|#]] 초기 삼국시대에서 수백년이 지난 한참 후대의 일인 [[통일신라]]기 인물인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지증대사비]] 비문에서도 '''偏頭居寐錦至尊(편두거매금지존)'''이라는 문장이 있다. '매금'이란 신라 왕의 호칭인 [[마립간]]의 다른 한자표기이므로 이 문장의 뜻은 '''편두이신 신라왕지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출토된 신라 금관들은 하나 같이 지름이 작아 성인 남성이 실제로 썼다고 보기 어려운데, 신라 왕들이 편두를 했다고 가정하면 이치가 맞아 떨어지게 된다. 다만, 이 문장은 단순히 '''우리편 대빵 신라임금님 킹왕짱'''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삼국지 기사의 '편'자는 {{{+2 褊}}}(좁을 편)이고 지증대사비의 '편'자는 {{{+2 偏}}}(치우칠 편)이다. 또, 삼국지의 기사는 편두에 대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지만, 지증대사비의 기사는 아무 설명없이 여기서만 '편두'라는 낱말을 쓸 뿐, 이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무 설명이 없다. 그리고 신라 왕관에 대해선, 지름이고 뭐고 간에 '''그 쓰는 법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두건이나 상투 같은 것을 하고 그 위에 왕관을 썼다면, 왕관 지름이 머리 지름보다 작은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최치원 시기의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는데, 당나라의 기록에선 편두에 대해서 찾아볼 수가 없다. 당장 [[무열왕]]부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 기사가 전해지는데 편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결국, 원삼국시대 와 달리, 통일 이후 하대 신라, 특히 왕족에게 편두 풍속이 행해졌는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확실하게 입증할 수 없다. 어쨌든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삼한의 편두가 고대 신라의 샤머니즘이나 천손 강림 신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긴 하다.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입 부분이 닭처럼 생겼다[* 다만 잊지말자. 알영 설화에서는 그 입의 부리 부분이 애를 씻기니까 '''떨어졌다.''']거나 [[김알지]]가 닭이 우는 숲에 있던 알에서 태어났거나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 왜냐면, 편두를 하면 사람의 얼굴 형태가 ~~주둥이~~ 구강부가 튀어나오고 이마가 들어가기 때문에 [[새]]의 두상과 흡사한데, 초기 신라의 각종 [[닭]]과 관련된 설화와 그 형태성이 유사하지 않냐는 것. 하지만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어 추론에 그칠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