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부 (문단 편집) == 수도-서북 갈등의 중심지 == 평양부는 [[묘청의 난]] 직전까지의 고려시대, 외침을 딛고 경제가 성장한 조선 후기에는 수도와 정치적 갈등이 컸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시대 평안도 지역의 과거 합격률과 중앙 진출 사례를 통해서 두드러지는데,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인 평안도 정주목의 경우는 조선시대 지방에서 과거 합격률로는 조선 후기 최고였으나 중앙 정계로 진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이전에 평양부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에 영향을 받은 명문가와 궁궐, 사찰 등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그 위상이 드높았으나, 고려시대 여러 차례의 외세 침입과 묘청의 난 등을 거치면서 평양지역 명문가들이나 토착 세력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로도 고려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중앙 조정에 입지가 거의 없어 차별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영의정까지 오른 평양 조씨가문의 [[조준(조선)|조준]]이나, 대사성까지 오른 평양 이씨가문의 이희보와 같이 평양부에서 자리잡은 명문가들의 경우는 중앙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로도 이들 가문은 어느정도 평양부 내에서도 상당히 대우를 받았다. 실제로 조선왕조 500년동안 평양을 대표한 명문가인 평양 조씨가문은 영의정 외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당장 태종실록에서 물이 흐르는 듯이 업무처리를 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개국공신 [[조박(조선)|조박]]도 평양 출신이었고, 조준의 아들이었던 [[조대림]]은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와 혼인을 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이후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가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세종(조선)|세종]]이 직접 3일동안 조회를 멈추고 쌀과 콩, 종이 200권을 부조로 내렸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하였음을 감안하여야 한다. 앞서 언급하다시피 조정에서도 이 지역의 역사성을 무시한 건 아니지만, 1633년의 인조실록에도 이미 임금에도 평양부를 포함하는 '서북민'의 등용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다. [[https://sillok.history.go.kr/id/kpa_11110015_002|#]] 이 당시는 그나마 호서 혹은 영남 출신이 대우를 받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후 수도와 지방의 격차가 심해지는 '경향분기(京鄕分岐)'의 흐름 속에 한양 사람이 아니면 영남 출신이든 호서 출신든 서북 출신이든 모조리 정계에서 배제되는 경향도 생겼고, [[탕평책]]이나 [[흥선대원군]]의 지역 안배 정책도[* 심지어 고려 왕조와 관계가 있다고 여긴 모양인지 [[강화도]]까지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1_0040_0030_0030_0030|#]] '기호'와 서북이 아니라 수도와 서북 등 그 이외의 차별이라고 여긴 것이다. '기호'가 지역 문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양반 가문은 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출신까지 [[김구]]처럼 기호파에 섰지만, 명문가의 편에 서지 않으면 서북파가 되던 신분갈등의 일환이다.] 큰 효과가 없어[[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7_0040_0020_0010|#]] 함경도 출신의 [[이용익]]도 대접받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시대까지 정치적으로 제대로 대우받기는 어려웠다. 서북, 특히 평안도가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는 사람들이 많아 과거 합격률이 높았기에 지방 중에서는 한양에 반기를 들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던 그 이외 시대에는 반기를 들 세력도 없었기에 정치적 충돌이 드러나지 못했다. 또한 인터넷에서는 [[북한]]에 대한 혐오를 과거에까지 소급시켜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을 무슨 유럽의 지역갈등처럼 서술하는 사례가 자주 발견되는데 평안도가 역사적 가치가 없어서 차별받은 것이 아니라 평안도 사람이 명문가가 아니어서 차별받은 사례이다. 저런 논리라면 평양 출신 [[유일한]][* 실제로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므로 '평양부' 출생이다.]이 세운 [[유한양행]]이나 평양에서 재건한다는 의지가 강한 [[숭실대학교]]까지 차별해야 한다. 분단이 되리라고는 1945년까지 거의 예상을 못했고, 심지어 평양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