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지하철도 (문단 편집) == 운행 노선 == [[파일:평양지하철도노선도.jpg]] 1968년 착공하여 1973년 9월 6일 천리마선 [[봉화역(천리마선)|봉화역]]에서 [[붉은별역]]까지, 1975년 10월 혁신선 [[혁신역]]에서 [[락원역(혁신선)|락원역]]까지 개통하였다고 전한다. 1978년 9월에는 혁신선 혁신역에서 [[광복역]]까지 추가로 개통하고, 1987년 4월 10일 천리마선의 연장선인 [[만경대선]]이 [[부흥역(만경대선)|부흥역]]까지 완전 개통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만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며 북한의 경제가 과거보다도 더 악화되면서 무려 '''36년'''째 신규 구간이 개통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오래 신규 개통 소식이 없는 지하철은 아니다. [[글래스고 지하철]], [[PATH]], RTA, 필라델피아 지하철([[SEPTA]], PATCO)가 평양지하철도보다 더 신규 개통이 없다. 1974년 8월 15일 개통된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 [[수도권 전철 1호선]]보다 1년 일찍 개통되었다.[* 참고로 남북한의 경제 규모에 있어 수치적으로 역전된 해가 1974년이다. 정확히는 UN 통계 기준으로 1974년 기준 남한의 1인당 GDP는 571$였고, 북한은 515$였다.] 다만 [[서울지하철]] 건설 계획자체는 [[1960년대]] 후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북한과는 별로 상관없이 결정된 것이기는 하다. 물론 체제 경쟁이 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먼저 건설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더욱 자극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에 재빠르게 개통한 느낌도 아예 없지는 않다. 물론 서울지하철의 개통이 평양보다 늦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현옥]]이 '불도저 시장'답게 하도 공사를 벌려서 개발하다보니까 막상 지하철 건설에는 쓸 돈이 없어지는 바람에 건설이 늦어진 것이 가장 크며, 후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을 팔고 외국 차관도 좀 얻어오고 나서야 서울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통이 늦어진 것이다. [[1기 지하철 계획]]이 처음 나온 게 [[1967년]](최종 확정은 1971년), 심지어 그때 [[수도권 전철 5호선]] 계획도 미리 세워져 있었다. 1974년이면 [[부산 지하철 1호선]] 초창기 계획(1971년)[* 물론 이후로 사정상 이래저래 변경하여 [[1985년]]에 겨우 개통되었다.]도 나왔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어진 지하철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메트로]]. 실제로 대한민국 매체에서 평양 지하철이 서울 지하철보다 빨리 개통되었다는 것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참고하면) 1985년 [[동아일보]] 방북기사다. 사실 1985년 정도가 되면 평양은 2호선 정도가 개통된 반면에 서울은 [[수도권 전철 4호선|4호선]], [[부산광역시|부산]]에도 [[부산 지하철 1호선|1호선]]이 뚫려서 지하철 스펙 경쟁에서는 완전히 승리한 시점이었고, 수해가 났을 때 북한에서 쌀도 받아먹을 정도[* 당시 전두환이 각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지원 물자를 받기로 결정했는데 받아보니 그 질이 굉장히 조악했고 먹지 못해서 버린 쌀도 많았다고 한다. 답례로 당시 한국에서 생산하던 TV 등을 잔뜩 북으로 보내주었고 그렇게 역관광했다.]로 꽤 유화책을 쓰던 시기이니 별 신경 안 썼을 듯하다. 다만 평양에 2개 노선의 지하철이 있다는 것은 (늦어도) 1977년에는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 원래 계획은 천리마선 봉화역 아래로 [[대동강]]을 하저터널로 지나서 강 동쪽 지역까지 지하철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1971년 [[봉화역(천리마선)|봉화역]] 건설 도중 하저터널이 붕괴되어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후 5번에 걸친 시도 끝에 해저터널안은 폐기되었고, 대신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맞아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고향집|만경대]] 방향으로 2개 역을 추가로 개통하는 만경대선을 신설하게 된다. 그래서 동평양 개발계획이 [[김정은]]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의 1970~1990년대 강남대개발처럼 의욕적으로 진행되지 못해서 현재도 동평양이 서평양보다 뒤떨어지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에 [[신의주]]를 관문도시로 개발하는 김에 지하철도 지을려고도 했엇다. 하지만 예산문제로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계획은 백지화된 채로 흐지부지되었다.]참고로 평양 지하철이 가장 많이 참고한 구소련 [[모스크바 지하철]]의 경우, 냉전 시절에 지어진 노선 역시 미국과의 핵전쟁을 대비해 깊게 짓긴 했지만 모스크바 강을 지날 때는 지상으로 올라와 다리로 건넌다.([[보로비요비 고리 역]]) 소련 초창기에 지어진 노선은 모스크바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노선은 [[평양 지하철도 혁신선|혁신선]](20km), [[평양 지하철도 천리마선|천리마]]-[[평양 지하철도 만경대선|만경대선]](14km) 이 있으나, [[환승역]]은 천리마선 전우역/혁신선 [[전승역]] 하나 밖에 없다.[* 이 역간의 환승통로가 없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환승통로가 있다고 한다. 월간 '북한'에도 관련 내용이 실려있고 탈북자들의 증언에서도 전승역 환승통로가 있다고 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도림역/환승|환승통로가 사람으로 너무 붐벼서 걸음도 더디고 숨막힌다고 한다.]]] 유사시 방공호로 쓸 수 있도록 깊게 건설했다. [[1995년]] [[김일성]]의 관저였고 김일성의 [[엠버밍]]된 시체가 보관된 [[금수산태양궁전]] 앞의 [[광명역(혁신선)|광명역]]이 폐쇄되었고, 인근의 [[삼흥역]]에서 출발하는 셔틀 [[노면전차]]를 운행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