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창군(조선) (문단 편집) == 선조 시기 ==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 가장 잘 알려진 평창군수 안동 권씨로 1543년(중종 38년)~1617년(광해군 9년)까지 살았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산성을 재보수하고 응전했으나 점령되자 가족과 군민들을 매화굴(응암굴)로 피신시키고 이지사함·우응민·이인노등과 함께 군민들이 천연의 요새인 응암굴에서 강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왜군에 항전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여러 관원들과 포로가 되었다 그후 원주로 끌려가 적진 가운데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세밀히 탐지해 관군에게 알렸는데, 이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호구록|호구일록(虎口日錄)]]이다 서고에 갇혔으나 서고의 벽을 뚫어 탈출 후 평창으로 돌아갔다 이때 평창군민들의 환호를 받았다고한다 백유항(白惟恒) 정유재란 당시 현령 선조 30년 10월 13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수령들에 대해 아뢴 내용에서 왜적이 경내까지 들어올 때 마지막으로 피신할때 잡혔으나 가까스로 도망가 도내에 있었다 평창군수 강봉수(姜鳳壽) 사간원에서 산골짜기의 매우 잔폐(殘弊)한 고을로서 백성이 30호[* 집 30채]도 못되므로 소생하도록 하려면 현저하게 근간(勤幹)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라고하며 나이가 늙고 성품도 어리석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라고 하여 밑에 김호로 바뀌었다 평창군수 김호(金浩) 선조 37년(1604년) 임명됐다 선조 38년(1605년) 강원도에 대규모 폭우로 "이달 20일 큰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동북풍이 거세게 불어 물가의 민가 10여 채가 전부 떠내려 갔고 올곡식과 늦곡식이 모두 손상되어 추수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변이가 비상하다" 라고 하였다 아마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하여 관직에서 잘린 것으로 보인다 평창군수 조공근(趙公瑾) 선조 39년(1606년)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