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택·당진항 (문단 편집) == 역사 == 평택 · 당진항은 짧게는 80-90년대에 계획 및 수립되어 신설된 신식항구로 볼 수 있고 길게는 과거 중국 대륙과 교역했던 아산만 일대 나루터들의 기능을 계승한 항구라고 볼 수 있다. >伊山郡 本百濟馬尸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目牛縣 本百濟牛見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今武縣 本百濟今勿縣 景德王改名 今德豊縣 >혜성군(槥城郡)은 원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당진현(唐津縣)은 원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읍현(餘邑縣)은 원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미현(餘美縣)이다. 신평현(新平縣)은 원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三國史記 卷第三十六 雜志 第五) 평택 · 당진항에서 당진(唐津)이라는 지명은 ‘[[당나라]]로 가는 나루’라는 의미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백제]]가 명명한 벌수지현(伐首只縣)을 개칭한 것이다. 이름값답게 삼국시대 말기 당나라 군대가 아산만 남쪽의 당진에 상륙하여 백제를 공격했고 신라의 사신들 또한 중국으로 가기 위해 주로 거쳐가는 곳이었다. 이처럼 삼국시대 당시에도 당진은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지역이었고 아산만 일대는 무역을 하기 위한 배들의 집결지로 통했다. 그로인해 당진은 원나라의 해금령 이후 중국과의 해상교류가 쇠퇴한 여말선초에도 집결지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홍주목, 공주목 등 충청우도 관할 '[[내포지방|내포]]'지역의 세곡이 집결하는 범근'내포'[* 작은 따옴표에서 알 수 있듯이 범근내포는 항구가 관할했던 지역을 통칭하는 '[[내포지방|내포]]'라는 단어의 어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집결지였다.]가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했다. 한편 아산만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대진(大津)’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큰 항구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대진이 오늘날 평택 · 당진항의 모체로 여겨지는 항구다. 그러나 대진이 과연 어디인가를 두고 두 지자체가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평택시는 포승읍 만호리 일대가, 당진시는 송악읍 한진포구 일대가 대진이었다고 주장한다. 애석하게도 여러 고지도들과 사료들마다 대진을 표기하거나 명시한 장소가 제각기 달라 장소를 특정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한진포구와 만호리 두 포구를 나룻배들이 정기적으로 건너다녔기에 아산만을 사이에 둔 두 지역 모두를 대진이라 불렀다는 설과 큰 나루를 뜻하는 대진을 음차한 한진(漢津)이 바로 대진이라는 설이 양립한다. 다만 대진이라는 지명을 명목상으로나마 승계한 지역은 사실상 한진포구 한 곳 뿐이므로 한진포구와 그 일대가 대진의 명맥을 이어간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진포구와 그 일대는 일본으로 숭어 어란, 준치, 삼치 등을 50톤급 증기선으로 실어 나를 정도로 고기가 잘 잡혔다. 덕분에 수산사(수협)와 헌병 주재소가 포구에 자리잡고 인천을 왕복하는 증기선이 정기적으로 다니는 등 나름 규모 있는 포구로 이름을 날린다. 하지만 점차 도로 교통이 발달되고 삽교천 방조제와 아산만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해상교통은 그 의미를 잃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방조제 건설 이후 민물유입이 차단되어 아산만의 바닷속 환경이 변해버리자 어족자원 상당수가 모습을 감추었고 그 결과 한진포구는 점차 쇠퇴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평택 · 당진항이 구상되기 시작한 시점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 집적이익과 효율성 창출에 유리한 국가산업단지를 여러군데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정부는 포항에서의 제1종합제철소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제2종합제철소 건설도 추진하게 되는데 그 결과 두 계획을 합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행키로 한다. 제2종합제철소는 물론 국가산업단지와 독자적인 항구까지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업지대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여러 장소가 물색됐고 그 중 아산만 일대가 대규모 임해산업 육성과 수도권 내 공장 이전이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후보지로 선정된다. 마침내 1979년 12월 14일 건설부가 아산만과 가로림만 일대 3억평을 세계적인 임해공업지대로 개발한다는 방침아래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지정(건설부 고시 제514호)하면서 아산만 개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아산산업단지는 대규모 개발을 위해 크게 4부분으로 개발방향이 설정되었다. 첫째, 아산만 지역의 완만한 구릉지와 간석지의 매립으로 광활한 부지확보가 가능한 포승지구에는 철강 및 그 연관산업을 유치하며, 둘째 도시지역과 인접한 내륙지역에는 수도권내 이전공장을 유치할 공업단지로 개발하고, 셋째 매립에 의해 광활한 용지확보가 가능하고 외해에 면한 지역에는 석유정제, 석유화학, 비철금속, 기계 등의 기간산업을 유치할 대단위 공업단지와 장래 공업용지의 수요추세에 맞춰 개발할 유보지역으로 계획하고, 마지막으로 배후도시를 기존의 주변 도시지역과 연담화 및 주변의 자연적인 지형지세를 고려하여 신산업도시로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1년 11월 4일 제2종합제철소의 입지가 광양만으로 변경됨에 따라 계획이 대폭 축소되고 개발구역도 1,000㎢에서 63.3㎢로 확 줄어든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 수도권 규제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규제 영향권에 놓인 경기도 평택시의 포승지구는 눈 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산단수립계획 일부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LNG(액화천연가스)기지가 평택시 포승읍에 만들어질 수 있었고 1986년 11월 기지 내 유류취급용으로 만들어진 돌핀부두에서 아산만 지역 최초의 현대식 선박이 입항한다. 그리고 동년 12월 항만법 시행령 제2조에 따라 아산만 일대의 항구이름은 돌핀부두가 위치한 평택시의 이름을 딴 평택항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항해 새로운 대진(大津)의 탄생을 공식화한다. 그러나 수도권 규제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아산만 북쪽 경기도 포승지구에 세워둔 개발계획 상당수는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배후의 평택항도 한동안 찬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산만은 경기도만의 바다가 아니다. 아산만 남쪽은 충청남도 당진군이 있고 이 지역은 수도권 규제와 무관한 곳이다. 덕분에 당진군은 수도권 규제를 피해 이전한 공장들로 반사이익을 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그러던 와중 1989년 철강산업 진출을 노리던 재벌기업 한보철강이 포승지구 대신 당진군 고대지구를 새로운 제철소 부지로 낙점한다. 그러자 기존 철강업체 및 하청업체 또한 당진에 자리 잡게 되어 산단수요가 빠르게 늘어났고 이에 정부는 당진군 고대지구, 부곡지구의 제철소와 산단을 위한 항구시설을 건설한다. 하지만 이들 부두들은 사실상 국가산단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평택항이 관할하였다. 그런데 1995년 7월 1일부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제도 시대가 개막하면서 문제점이 생겨난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기존 국가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던 항구시설은 각 지자체별 항만공사가 관리하고 소속 지자체에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문제는 평택항이 아산만 일대를 관할하는 항구이기에 아산만에 인접한 평택은 물론 당진 소속 부두들까지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즉 평택항은 평택 소속이기에 항구와 관련된 모든 시설과 인력과 자본과 세금이 몽땅 평택으로 가버리는데 당진의 항구시설까지 관할하므로 당진의 항구에서 창출된 모든 경제적 이윤 또한 평택이 남김없이 가져간다는 행정적 문제가 터진다. 나아가 1996년 정부에서는 평택항을 3대 국책항만 및 5대 국책개발사업으로 선정해 중국을 겨냥한 대규모 항구로 탈바꿈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문제는 아산만을 관할하는 항구의 이름만 평택항일뿐 아산만 수역의 절반 이상이 당진군 수역임에도 계획안에 따라 아산만 한복판에 새롭게 매립되어 만들어질 시설들 또한 평택항 관할이 된다는 점이었다. 당진땅에 멀쩡하게 있는 항구도 평택에 빼앗겨 서러운데 앞으로 바다는 물론이요 바다를 매립한 매립지까지 평택에 빼앗긴다는 사실에 당진군 군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고조된 갈등은 아산만을 가로지르는 서해대교의 도계를 표기할 때 폭발해 평택과 당진 간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건 소송전이 시작된다. 이후 이야기는 관할구역 갈등에서 서술. * 당진지역에 위치한 당진항을 2004년에 흡수함으로써 얼마전까지는 평택·당진항이라 불리었었다. * 평택항의 개발과 운영을 위해 2009년 10월 29일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일대에 마린센터를 마련하고 경기평택항만공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 2015년 3월 29일 [[평택역]]에서 평택항을 지키자며 서명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평택에서는 역앞에 되찾았다고 현수막까지 걸렸었다. 되찾았다는 건 매립지 관할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문제는 지금 헌재와 대법원에 소송 하였으나 패소하였다. 반대로 당진지역에선 당진항 지키자며 [[당진공영버스터미널]] 광장에서 서해대교 모형탑을 설치하고 그모형탑에 당진항사수라고 써있다. [[지역감정]]이 심한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