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도주/이탈리아 (문단 편집) == 역사 == > [ruby(그래웃, ruby=Grai)]들이 서쪽 끝 저녁 땅이라 부르는 곳, >오래된 고장, 군사와 비옥한 대지로 강력한 곳, >포도의 백성이 살았고 이제 소문에 후손들이 >족장 이름을 따라 [ruby(이탈랴, ruby=Italia)]라 부른다는 터전, >그곳이 우리 근거다. 예가 [ruby(달다눗, ruby=Dardanus)]이 태어났고 >우리 민족의 시조 [ruby(이세웃, ruby=Iasius)]이 태어난 곳이다. >---- >-[[아이네이스]] 제3권 163-168행. 김남우 번역. 기원전부터 [[에트루리아]]인들과 [[고대 로마]]인들, 남부 해안가의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포도경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처음 이탈리아의 대지를 봤을 때, 그 기상조건이며 토양이 너무나도 와인 제조에 적합하다고 감동하며 '와인의 땅(에노트리아 테르스)'이라고 했다. 이 '와인의 땅'에는 한때 400종류나 되는 토착 품종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은 [[포도]] 수확과 와인 [[양조]]를 하는 날(Vendemmia)이 전 제국적인 행사일이었고, 포도 묘묙에 대한 경작과 이식, 양조에 대한 선진적인 기술을 습득해 제국 영토 곳곳에 전파시켰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탈리아 와인의 수난기가 시작되었다. 봉건 지도자들은 와인의 판매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고, 각 도시를 거칠 때마다 부과되는 이동세도 부과되었다. 이민족이 여기저기서 이탈리아를 침략했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포도]]농장이 망하는 일이 허다했다. 농촌들은 이농과 해체 등 시련을 겪었고, [[고대 로마]] 시대에 자유인이었던 농민들은 [[농노]]로 전락했다. 북방 민족들이 많은 포도밭을 목초지로 개량했던 것도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와인의 재배는 이어지고는 있었다. 사유재산의 보호가 어려웠던 당시에 그나마 안전했던 [[수도원]]은 미 경작지의 개간을 수행했고, [[미사]] 중 쓰일 용도와 지역 자체의 수요로 와인 제조는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침략과 약탈의 빈도가 줄어들고, 봉건 세력들간의 싸움도 안정화되면서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은 다시금 활발해졌다. 13세기에 이르면 대부분 지역에서 [[농노]] 경작이 사라졌고, [[르네상스]]와 상업 혁명이라는 부흥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포도 농업과 양조업에도 진전이 이뤄져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포도주들이 이 때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는 외국 세력의 각축장이 됨으로써 포도주 생산도 타격을 입었다. 잇따른 전쟁과 외국 세력의 침략은 [[로마 제국]] 말기의 혼란을 연상시킬 정도로 농촌을 황폐화했으며, 특히 북부가 심각했다. 이탈리아의 내부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이탈리아 포도주의 위상은 일찍이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이 때 이탈리아 주요 와인들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왕실의 하청이나 받아 생산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800년대 들어서 북부 [[사르데냐 왕국]]과 중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질적인 향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는 1850년 오이디푸스 균이 유행하면서 한 차례 더 타격을 받았다. 다만 [[사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 수상은 철저한 예방작업을 벌여 피에몬테 지역 와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공헌했고, 이탈리아 와인은 병충해 피해가 그나마 덜했던 피에몬테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를 중심으로 유럽 시장에 포도주를 공급하면서 다시 도약했다. 이탈리아 와인은 1970년 이후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를 필두로 해서 고급화가 이루어졌고, 슈퍼 토스카나 등의 외국 포도와의 블랜딩한 와인이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