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모소 (문단 편집) == 생애 == 포르모스는 로마 인근 [[오스티아]] 출신으로 864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포르투스(Porto)에서 사목하였다. 이후 교황의 외교 사절로서 그는 866년에는 불가리아를, 869년과 872년에는 서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요한 8세]] 시기에 여러 죄목으로 파문 위기에 처했고 사실상 유배되어 서프랑크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요한 8세 사망 후 후임 교황 [[마리노 1세]] 때 자신의 사목지인 포르투스(Porto)를 되찾았고, 이후 여러 교황 휘하에서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891년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이 된 후 대외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크게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서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의 왕위 문제 등이었다. 세속적으로 보면 교황도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 세력으로 외교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안되었지만 문제는 주요한 외교 정책이 죄다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가 실각하긴 했지만, 그에게 서품받은 성직자들을 배척하고자 했던 포르모소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후 교황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된다. 서프랑크 왕위 다툼에서는 [[샤를 3세]]를 지지했고, [[외드]]를 밀어내고 샤를 3세가 자신의 계승권을 확보했으나 포르모소 사후 [[로베르 1세]]와 그의 사위 [[라울(서프랑크)|라울]]에게 밀려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탈리아에서의 문제인데 포르모소는 당시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귀도 3세]]와 그의 아들 [[람베르토]]를 불신했고, 케른텐의 [[아르눌프]]를 부추겨 이탈리아에 침공하도록 한 것이었다. 포르모소의 의도대로 아르눌프는 승승장구하여 람베르토를 밀어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여기까지는 좋았고 포르모소도 이 시기에 사망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