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카스 (문단 편집) === 즉위 전 행적 === 부친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모친은 도멘치아(Domentzia)라고 하며, 동생 도멘치올루스, [[코멘티올로스]]가 있었다.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일부 학자들은 훗날 아나톨리아에서 활약한 동로마 장성들 중 '포카스'라는 성이 자주 등장한 것을 근거로 그 역시 아나톨리아 출신이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트라키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트라키아 출신의 [[레온티아]]와 결혼하여 딸 도멘치아를 낳았다. 훗날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레온티아 역시 황후가 되었는데, 이전의 황후인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와 [[콘스탄티나]]가 새겨진 주화가 별로 없는데 비해 레온티아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이 다량 주조되었다. 이로 볼 때, 그녀의 원래 신분은 남편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7세기 초, 포카스는 [[아바르]]와 [[슬라브]]의 침략으로부터 다뉴브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파견된 군대의 장교였으나 정확한 직책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라클리오스]]에 호의적인 동로마 저자들의 기록에는 그를 하급장교 또는 [[백인대장]]으로 묘사하지만, 서유럽측 기록에서는 그가 고위 관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밝혔다. 8세기의 이탈리아 [[수도자]]이자 역사가 파울 [[부제(성직자)|부제]](Paul the Deacon)는 포카스가 스트라토르(strator: 말을 돌보거나 조달하고 지휘관의 참모 역할도 수행하는 고위 관직)였다고 기술했으며, 7세기 프랑크 역사가 프레데가르는 포카스가 귀족이자 중요한 군사 계급을 맡은 장군이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아랍의 치하에 들어간 이집트에서 [[콥트 정교회]] [[수도자]]로 활동했던 니키우의 요한(John of Nikiu)은 포카스가 트라키아 방면군의 네 사령관들 중 한 명이라고 서술했다. 현재 학계는 이러한 사료의 불일치 때문에 포카스가 하급 장교였다는 기존의 통설에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시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서방 및 동방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하자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데 상당한 희생을 치뤄야 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급기야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도나우 강]] 너머에 진군한 군대에게 진지로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겨울]]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이런 지시를 내린 건 병사들이 귀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지시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8개월 동안 도나우 강 너머의 야만족과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심신이 고단했다. 비록 아바르족과 싸워 이겨 상당량의 [[전리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에 돌아가서 시장에 팔기 전에는 그런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야만족이 곳곳에 도사리는 위험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 위험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분노했고 세쿠리스카 요새에 이르렀을 때 더이상의 진군을 거부했다. 지휘관 페트루스는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호소했지만, 병사들은 황제의 동생이니 황제 편을 드는 게 당연하다며 비웃고는 포카스를 방패 위에 올리고 지도자로 선출했다. 페트루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반란 소식을 전했다. 당시 마우리키우스는 지난 겨울 동안 기근이 시작된 이래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 반감을 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페트루스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황제는 심히 당황했다. 이때 페트루스는 반란군 측이 황제에게 전하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이 전갈에 따르면, 반란군 병사들은 정작 포카스를 황제로 뽑은 것은 아니며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거부할 뿐 황실에 대한 충성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들은 황제의 1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마우리키우스의 아들)|테오도시우스]]나 장인 게르마누스를 새 황제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즉각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소환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매질을 당했고 게르마누스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잡으러 온 황궁 근위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우리키우스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형 경기장에 민중을 소집한 후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원형 경기장엔 청색당과 녹색당이 파벌을 나뉘어 수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두 파벌의 충성을 확인한 후 두 당이 힘을 합쳐 반란군을 막는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청색당원의 지지는 확인했지만 녹색당원의 지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다가 황제가 지금까지 제물을 베풀어주지 않고 인색하게 군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내 기근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자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급기야 군중은 폭동을 일으켜 황궁 앞 광장까지 진격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수도 경비대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그들이 거부했다. 결국 602년 11월 22일 밤, 마우리키우스는 아내와 여덟 명의 자식, 그의 충신인 동방의 민정 총독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와 함께 변장을 하고 황궁을 빠져나간 다음 일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복귀한 바 있던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에게 의탁하려 했다. 한편, 게르마누스는 대성당에서 나온 뒤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청색당 편에 속했지만 수적으로 더 많은 녹색당의 지지를 얻고자 녹색당의 지도자 세르기우스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황제가 될 경우 충분한 대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녹색당은 게르마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될 경우 입을 싹 씻고 청색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 것이라 판단해 이를 거부하고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포카스는 당초 추대하고자 했던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비로소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병사들을 포섭한 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11월 23일,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노변에 운집한 군중에게 금가루를 뿌리며 수도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이튿날에는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때 병사들에게 전통적으로 주는 하사금을 내렸고 화려한 행사를 열어 백성들을 즐겁게 했으며 자신의 아내 [[레온티아]]에게 [[황후]]를 뜻하는 [[아우구스타]]의 직함을 수여했다. 그런데 마지막 행사에서 청색당과 녹색당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청색당원 몇 명은 이렇게 외쳤다. >"[[마우리키우스]]는 죽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라!" 물론 포카스는 그걸 잊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병사들을 보내 도망치고 있던 마우리키우스 일행을 체포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아들들은 모조리 참살당했고 시신들은 갈기갈기 찢겨진 뒤 바다에 버려졌다. 또한 수급들은 따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어 헵도몬에 내걸렸다. 또한 전 황제의 밑에서 군비 마련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민중의 미움을 샀던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 등 주요 관료들도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마우리키우스의 동생 페트루스, 선황제의 태자 테오도시우스 같이 제위를 위협할 만한 이들도 심한 [[고문]]을 가한 후 처형했다. 다만 게르마누스는 포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제가 된다는 조건하에 목숨을 건졌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아내 [[콘스탄티나]]는 세 황녀와 함께 [[수녀원]]에 감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