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폭군 (문단 편집) ==== 중국사 ==== || '''{{{#ffffff 나라}}}''' || '''{{{#ffffff 왕호}}}''' || '''{{{#ffffff 재위기간}}}''' || '''{{{#ffffff 비고}}}''' || || [[하나라|하]] || [[걸왕]] || || [* 하나라 자체가 기록만 있고 유적,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나라라서 상나라가 지어낸 없는 나라라는 설이 있다.] || || [[상나라|상]] || [[제신]] || B.C. 1075년 ~ B.C. 1046년 || [* 조작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걸과 주 모두 머리가 비상하고 용맹무쌍한 점, [[달기]]와 말희에게 홀려 폭정과 [[가렴주구]]를 일삼은 점, 탕과 서백 창을 가두었다가 뇌물과 미녀를 받고 풀어준 점, 풀어준 인물들이 각각 [[상나라]] 탕왕과 [[주문왕]]이 되어 새 왕조를 세운 점 등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손호]]나 [[의자왕]] 등도 비슷한지라 아주 [[막장]]이 아닌 폭군들은 한두번씩 재조명 주장을 받기도 한다.][* 다만 그런 재평가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폭군의 대명사로서의 지위는 매우 확고하다. 위의 하나라 걸왕과 합쳐 걸주라고 흔히 지칭되는데, 연산군이 조선 폭군의 대명사라면 이쪽은 한자 문화권 전역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 || || [[진(영성)|진(秦)]] || '''[[시황제]]''' || B.C. 247년 ~ B.C. 210년 || [* [[분서갱유]]와 [[불로장생]]에 대한 집착 때문에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많지만 [[전한|한나라]]에서 왜곡했다는 설이 있고 만리장성이나 큰 도로를 건설하고 문자,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하나로 묶음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리해게 살도록 했으며 하루에 죽간 120근을 처리해야 잠에들 정도록 지독한 일벌레였다. 분서는 신하인 [[이사(전국시대)|이사]]가 "학자들이 옛것만 배우고 현재를 비난해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라며 제안해 진시황제가 받아들여 한 것이다. 즉, 옛 전국시대는 잊고 현재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따르도록 한 것으로 개혁이라고 본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공인한 유학 서적들, 백성들이 편리하게 살고 과학기술에 발전이 될 농경, 천문학 같은 학문서적들은 황궁 도서관에 보관했다. 갱유도 진나라 기록에는 "도사들을 땅에 묻었다."라고 짧게 언급했는데 나중에 한나라에서 사마천이 "460명이나 되는 유생들을 산채로 묻었다."라고 부풀려 기록한 것이다.] || || [[전한]] || [[무제(전한)|무제]] || B.C. 141년 ~ B.C. 87년 || [* 한무성세(漢武盛世)라는 전한의 전성기를 만들었지만, 전성기를 이끄느라 드는 재정의 부담이 너무 컸고, 무리하고 사치스런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신하들에게도 폭압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군이었다.] || ||<|4> [[북송]] ~ [[남송]] || [[송흠종|흠종]] || 1126년 ~ 1127년 || [* 아버지 휘종이 망쳐놓은 국정 운영과 정세가 금나라 쪽에 유리하게 변화하였다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정치는 폭군 수준이었으니 폭군 + 망국의 군주에 한정.] || || [[송고종|고종]] || 1127년 ~ 1162년 || [* 성격이 더럽다든지 향락을 많이 즐겼다든지 등의 논란이 있지만 그래도 송나라를 존속시키기 위해 노력한 황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 || [[송이종|이종]] || 1224년 ~ 1264년 || [* 즉위 초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잘하다가 임기 중반부터 권신 [[가사도]]를 재상으로 임명시켜 쿠빌라이하고 조약을 맺으라고 했더니 장강 밀약을 맺는 [[병크]]짓에도 뭐라 안하고 재상으로 계속 남게 하고 자기는 혼자서 향락에 빠진다.] || || [[송도종|도종]] || 1264년 ~ 1274년 || [* 역시 양부와 성격이 똑같은 건가, 양아버지인 이종하고 성격이 똑같다. 간신배 같은 [[가사도]]를 또 재상에 임명하여 자기는 또 나몰라라 하면서 후궁들하고 향락을 즐긴다. 하지만 그가 지적장애였다는 것, 아버지 이종이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임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 ||<|3> [[금나라]] || [[금희종|희종]] || 1135년 ~ 1150년 || [* 말년 한정. 하지만 뒤에 즉위한 황제가 [[해릉양왕|그보다 더 극악무도한 폭군]]이었기 때문에 폭군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었다.] || || [[위소왕(금)|위소왕]] || 1208년 ~ 1213년 || [* 즉위 이전부터 암군과 폭군 성향이 보였다고 한다. [[칭기즈 칸]]도 그의 행태를 보고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라는 등 강요하는 행동을 보여 훗날 금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한 축이 되었다. 또한 정치, 군사, 외교에서도 무능하다. 몽골이 처들어올 때 무능으로 유명한 금군 사령관 완안승유에게 약 49만명의 정예병을 주어 훗날 야호령 대전에서 모두가 전사하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의 노력으로 위소왕 시기엔 금나라가 멸망하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 || [[금선종|선종]] || 1213년 ~ 1224년 || [* 위소왕보단 외교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난 황제지만 정치에서는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무리하게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거나 거란족 대신들을 숙청하는 등 굉장히 폭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 ||<|3> [[몽골 제국]] ~ [[원나라]][* 적어도 몽골제국 시기는 중국사로 간주하기 어렵지만, 편의상 함께 기술한다.] || [[귀위크 칸]] || 1246년 ~ 1248년 || [* 성격은 포악했으나 정치나 외교, 군사 분야에선 나름 명군이었다.] || || [[몽케 칸]] || 1251년 ~ 1259년 || [* 무리한 남송 원정 시도. 하지만 그의 말년기였으니 말년 한정.] || || [[원혜종|혜종]] || 1333년 ~ 1370년 || [* 고려의 폭군 [[충혜왕]]은 잘 처벌했으나 자기 자신도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봤을땐 폭군 수준이었다. 다만 남중국쪽에서 [[명나라]]라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원나라도 선대 칸 ~ 선대 황제들의 국정 운영 때문에 망국으로 변했으니 폭군 + 망국의 군주에 한정.] || ||<|2> [[명나라|명]] || '''[[홍무제]]''' || 1368년 ~ 1398년 || [* 황권을 크게 강화하기 위해 관료들을 상상 이상의 규모와 방법으로 잔인하게 숙청해댔다. 그 대신 일반 백성들은 최대한 피를 덜 보게 했고 내치(內治)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한 [[명군]]이라 '''그 [[강희제]]가'''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와 [[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고 칭송했을 정도.] || || '''[[영락제]]''' || 1402년 ~ 1424년 || [* 위의 주원장과 같은 경우. 숙청을 엄청 해댔으나 정치를 잘했다. 다만 일부 정당성이라도 있었다는 홍무제와는 달리 영락제의 숙청은 불필요한 것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 || ||<|2> [[청나라|청]] || [[옹정제]] || 1722년 ~ 1735년 || [* 황제로 즉위할 때 직계 형제들을 상당 부분 숙청했다. 하지만 동시에 관료 사이에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바로 잡았고 옹정제 재위기에 청나라의 재정이 흑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두말할 것 없는 [[명군]]으로, 바로 위의 홍무제와 유사한 경우.] || || '''[[건륭제]]''' || 1735년 ~ 1796년 || [* 전대인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에는 체제 정비 목적으로 한정적으로 이루어진 [[문자의 옥]]을 시도 때도 없이 일으켜 역사상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언론 탄압, 문화 검열을 시도했고 청나라의 학문적 기반을 초토화시켰으며, '''10전 무공'''으로 잘 알려진 대외 원정도 [[버마]]와 베트남은 굴복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심한 피해를 본데다 무엇보다도 [[니오후루 허션]]이 청나라의 20년치 국가 예산에 달하는 규모의 자금을 부정축재할 동안 가만히 손 놓고 있었던 결과 건륭제 사후 청나라는 계속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 || [[중화제국(1915~1916)|중]] || [[위안스카이]] || 1915년 ~ 1916년 ||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