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역사 (문단 편집) ==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연대노조|연대노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DistributionOfPolesInCentralEurope.png|width=100%]]|| ||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달라진 폴란드의 영토. || 소련이 들어온 후 재구성된 폴란드는 영토적으로 상당부분 달라진 국가였다. 소련은 점령했던 영토를 소련령으로 병합했으며, 해당 지역들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가로 독립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반면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인들이 추방되면서 폴란드령으로 흡수되었다. 자세한 것은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조. 이 문제는 1960년대 [[독일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영토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 라고 천명했고, '브란트의 무릎 꿇기'와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폴란드가 차지한 옛 독일 영토에 대한 독일 정부의 포기 선언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47년]] [[총선]] 결과 노동자당의 압승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물론 소련이 개입한 [[부정선거]]였다. [[1948년]]에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병해서 연합노동자당이 되고, [[1952년]]에는 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폴란드 인민공화국(Polska Rzeczpospolita Ludowa)'이라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가 세워졌다. 이에 대해 영국은 국내에 머물고 있는 10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에게 시민권을 전부 부여하는 특혜를 수여했으나 그것으로 어디 보답이 되랴... 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나라를 숙적에게 45년간 점령당한 셈이다.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국가원수로 집권하여 스탈린주의식 정치가 펼쳐졌다. 공산당이 소련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비호 아래 잘 놀던 사이 폴란드 본국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수많은 군인들이 해외로 망명해서 폴란드를 위해 싸웠으며 국내에 남은 사람들은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를 조직해서 [[바르샤바 봉기]] 등의 숱한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소련은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전후에 폴란드를 점령하여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잡아다 [[시베리아]]에 보내버렸으며 대부분이 거기에서 옥사하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소장도 시베리아에서 옥사했으며 폴란드 국내에서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암살 작전을 지휘했던 아우구스트 에밀 필도르프(August Emil Fieldorf) 소장은 전후 폴란드 공산 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에 국내군을 포함한 반공우파 인사들은 6년간 폴란드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에 이어 [[소련]]과도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반소 반공 항쟁을 벌였는데 이들을 [[https://en.wikipedia.org/wiki/Cursed_soldiers|저주받은 병사]]라 부른다. 저주받은 병사의 저항은 마지막 요원인 [[https://en.wikipedia.org/wiki/J%C3%B3zef_Franczak|유제프 프란차크]](Józef Franczak)가 루블린에서 사살된 [[1963년]]까지 이어졌다. 반소 저항군들은 대부분 공산 정권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체포되어 징역을 산 이들은 대부분 대독 전쟁에 참여한 참전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민주화 시절까지 반역자로 몰렸으며, 민주화 이후 사면 복권 및 훈장이 수여되었다. || [[파일:포즈난 항쟁.jpg|width=250]] || || [[포즈난 항쟁]](Poznański Czerwiec)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1956년 포즈난 시위)] 한편 1956년 비에루트가 소련을 방문하던 도중에 사망하고 그 직후 반소 자유화 운동이 펼쳐지자([[포즈난 항쟁]]), 이를 강경진압한 국방장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쫓겨났다. 이로써 당내에서 스탈린주의파 강경파는 실권을 잃어버렸으며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폴란드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외교적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잔류하는 등 소련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했기 때문에 동시기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헝가리 혁명|와 다르게]] 뒤엎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임기 초반에 고무우카는 농업 집단화 정책을 중단시키고 언론통제를 완화하는 등 자유화 정책을 펼쳐나갔으며 그동안 대립했던 가톨릭을 복권시키는 등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책을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혁이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통제도 다시 강화되는 등 자유화 조치도 후퇴하면서 지식인층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거기에다가 60년대 중반 무렵부터 경제가 침체되면서 고무우카의 지지기반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졌다. 고무우카는 이를 [[서독]]과 외교관계 개선으로 풀려했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실망스런 정치를 펼친 것에 대한 면피로 보였다. 그리고 1968년 [[68운동|학생들의 시위]]로 위기를 맞자(시위 자체는 소규모라 비교적 쉽게 진압된 편이었다) 고무우카는 소련의 지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폴란드군을 출동시키는 짓을 [[프라하의 봄|해버렸고]], 때문에 당내에서도 고무우카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 그해 11월에 경쟁자들의 도전 속에 간신히 서기장 재선에 성공할 정도였다. 이후에 경기침체는 더더욱 심해졌고 1970년 크리스마스에서 급작스러운 식료품값 인상을 시행하자, 식료품값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당내에서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결국엔 사임하였다. 그 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집권해서 경제침체를 타개할 방안으로 서방과 좋은 관계를 맺고 경제개방정책을 폈다. 그 덕분에 당시 폴란드는 매년 9%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TV나 세탁기 같은 전자제품도 대대적으로 보급되는 등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고, 지지도가 높아진 기에레크는 소련과도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잘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은 [[오일쇼크|석유 파동]]의 여파로 폴란드의 수출이 크게 위축되면서 오래가질 못했고, 결국 1976년에 대대적인 물가인상을 시행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망감이 커져나갔다. 물가인상은 인민들의 저항으로 단기간에 철폐되었지만 그 대신에 외화난에 시달리면서 풍족해졌던 가전제품도 수입량이 줄면서 품귀현상이 벌어졌으며, 70년대 말에 이루어진 금리 인상으로 외채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가면서 폴란드는 파산 상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러한 을씨년스러운 상황에서 '''[[솔리다르노시치|자치노조 '연대']]'''가 결성되었다. 한편 1980년 기에레크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집권하며 새로이 등장한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를 인정했으나, 소련이 폴란드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자 군부에서 카니아를 내쫓고 [[계엄령]]을 시행했으며 강경파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집권하여 [[레흐 바웬사]]를 구금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이에 맞서 자유노조 연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공산당 독재 타도 투쟁이 전개되었다. 자유노조를 강경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빚을 상환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펴는 동시에 구제금융을 받기 위하여 IMF에도 가입하였지만 경제는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내핍을 강요받은 노동자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반감만 늘어났다. 이 당시 폴란드인들의 삶이 어땠는지 [[마르지]] 항목 참조. 결국 명분을 잃은 공산정권이 굴복하여 원탁회의가 진행되었고, [[동유럽 혁명]] 와중이던 [[1989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통일노동당([[공산당]])이 다수의 의석을 상실했다. [[1989년]] [[4월]] [[정당]], [[정부]], [[노조]], [[지식인]] 대표 등 55명으로 이루어진 '원탁회의(Obrada Okragłego Stołu)'에서는 헌법 개정이 합의되어 자유노조의 합법화, 자유선거에 의한 상원 신설, 하원 460석 중 35%의 자유선거, 대통령제 신설 등이 결정되었는데, [[http://ko.wikipedia.org/wiki/%ED%8F%B4%EB%9E%80%EB%93%9C%EC%9D%98_%EC%97%AD%EC%82%AC#.ED.8F.B4.EB.9E.80.EB.93.9C_.EC.9E.90.EC.9C.A0.ED.99.94|출처.]] 여기서 상원 100석중 99석 하원 161석을 자유노조가 차지했다. 본래 폴란드 통일노동당의 의도는 자유노조를 기존 정치체제에 편입시키는 대신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었다. 신설된 대통령직은 국회에서 선출되는 것이었는데, 원탁회의의 합의에 따라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초대]] [[대통령]]으로 지명하였고 야루젤스키는 본래 통일노동당 인사인 체스와프 키슈차크를 총리에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자유노조의 맹렬한 반발로 철회되고 자유노조 기관지의 편집장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동구권 국가 중 처음으로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현하는 기록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