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역사 (문단 편집) ==== 아니다 ==== 흔히 세간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제대로 된 결정을 못 내리는 귀족 공화정 체제 자체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의 주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되려 귀족 공화국 체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한 17세기 초반이야 말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최전성기였다. 나라 자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만장일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럭저럭 지배 계급의 이해가 일치하기 마련. 게다가 귀족 공화국 체제는 단순히 귀족들이 이거 저거 다 해먹는 게 아니라, 당시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인권 사상, 피지배자의 권리 등을 바탕으로 한, 나름대로 이념적 토대가 있었던 체제였기도 하다. 폴란드가 괜히 유럽 최초로 성문화된 헌법을 제정한 나라가 아니다. 지리적, 사회적으로 비슷한 처지였던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을 비교해보면 나름 장점도 분명하다. 중세 폴란드 의회는 자국 내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였던 것에 비해, 같은 시대 헝가리 왕국은 현금이 필요하면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한 후 추방했다가 다시 유대인 박해정책을 해제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국 내 상공업 기반이 더 취약해졌다. 또한 헝가리 왕국은 강력한 군주가 즉위했을 때는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갔을지는 몰라도 능력이 부족한 군주가 즉위했을 때 나라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무너졌지만, 폴란드의 경우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합쳐 여러차례 외세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무엇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국가 자체가 토후들의 정치적 연맹을 토대로 생긴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적, 정치적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 따라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확장 과정에서 현지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과정을 통해 급속히 영토를 확장하였던 바 있었다. 앞에 설명한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 4세가 다른 유럽 국가식 중앙 집권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만 맛보고 삽질만 했다. 지그문트 3세의 경우 왕당파 대귀족이자 뛰어난 헤트만으로 유명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분쇄하기는 했으나, 지그문트 3세는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국 반역자들을 사면하고 말았다. 세임이 귀족계급의 기득권 강화에 집착하였던 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전근대 동유럽 평야지대는 유럽 외부의 유목민 세력의 지속적인 침략 등의 이유로 농사지을 토지는 남아도는데 농업에 종사할 인력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농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고 토지에 묶어두는 정책은 비인간적이기는 해도 당시로서는 별 다른 대안이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