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푸량쭤 (문단 편집) === [[호법전쟁]] === 복벽 진압 이후 돤치루이가 약법 회복을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광저우에 호법정부를 세워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결정,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중앙정부에는 [[직예군벌]]의 수장인 [[펑궈장]]이 대총통으로 재임하면서 돤치루이의 무력통일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는데 펑궈장은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해 휘하의 [[리춘]]을 강소독군으로, [[진광원]]을 강서독군에 삼았는데 이에 맞서 돤치루이도 [[우광신]]을 장강상류경비사령 겸 사천사판사로, 그리고 1917년 8월 푸량쭤를 호남독군에 임명하였다. 8사단과 20사단을 거느려 호남에 부임한 푸량쭤는 9월 9일 독군에 취임, 호남성장으로 그간 호남에서 정권을 유지해오던 [[탄옌카이]]를 축출하고 호남의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호남군 2사단장 진복초는 푸량쭤의 지인으로 푸량쭤를 지지하고 있었고 1사단장 [[자오헝티]]는 상중이라서 1사단장 대리인 1사단 1여단장 이우문 포섭에 주력하는 한편 전성계엄총사령부를 조직, 스스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여 양광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쑨원의 호법 구호에 호응하여 9월에 영릉진수사 유건번과 여장 임수매가 돤치루이에 반대하며 봉기, 호법정부에 가담하여 [[청첸]]을 호법군 호남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푸량쭤는 즉시 장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견한 부대들이 항명하거나 도리어 호법군에 가담하는 등 전황은 삽시간에 푸량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급기야 1사단장 자오헝티가 호법군에 합류하자 푸량쭤는 8사단장 왕여현을 상남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0사단장 범국장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3만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호남 남부의 호법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허나 10월에 호법군 상남총사령부가 조직되고 [[청첸]]이 총사령관에 추대되었다. 초기에 푸량쭤는 임수매 등을 몰아내고 전 전선에서 전진하였으나 [[탕지야오]], [[루룽팅]]이 [[탄하오밍]]을 월계상연군총사령으로 임명, 20개 대대로 구성된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10월 말에 푸량쭤가 도로 밀리게 되었다. 급기야 직예파벌이었던 왕여현, 범국장이 11월 14일 정전을 통전하고 철수해버렸다. 대세가 기울어버린 것을 안 푸량쭤는 장사의 수비를 왕여현에게 남겨둔 체 자신은 호남성을 떠나 도주했다. 이에 당황한 돤치루이는 푸량쭤를 면직하고 왕여현을 독군에 임명했으나 11월 17일에는 왕여현까지 장사를 버리고 퇴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