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푸빙창 (문단 편집) === [[국공내전]]과 말년 === 1945년 [[중일전쟁]] 종결 이후 동북행영 주임 [[슝스후이]]로부터 국민혁명군이 광저우와 구룡반도에서 출발하여 다롄 항구에 입항할 것임을 통보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소련 외교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군의 만주 진입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였고 10월 6일, 푸빙창은 중국 정부에 "중소조약에 의거하여 다롄은 상업항구의 하나로서 화물을 운송하는 곳이지 군대를 수송하는 곳이 아니므로 어떠한 국적의 군대도 다렌항에 상륙하는 것은 중소조약을 어기는 것이기에 소련 정부는 이에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후 추가적인 협상이 이어졌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1949년 1월 12일, [[국공내전]]이 지극히 불리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몰로토프를 비밀리 방문하여 "중국 정부가 호소한 중국의 평화정착에 관해 4개국 정부의 우호적 협조는 필히 공동행동의 방식으로 행사될 필요는 없으며, 만일 소련정부가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의 평화담판 문제에 있어 소련 단독으로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면 중국 정부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소련의 단독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의 중재 요청을 거절했다. 1949년 3월 21일, [[허잉친]] 내각에서 [[우톄청]]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아 외교차장 엽공초가 대행하였으며 결국 5월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파리로 피신하였다. 1957년 5월, 타이베이를 방문하여 총통부 국책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에 초빙되었다. 1958년 6월 사법원 부원장에 임명되었으며 7월부터 공무원징계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65년 7월 29일 타이베이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